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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泫泫, 물방울에 맺힌 시선 – 김창열 [미술/전시]

물방울에 세상을 담다

by 백승원 에디터
2025.10.1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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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무슈 구뜨 도(Monsieur goutte d'eau)


 

작가의 방은 전시 순서상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긴 했지만, 가장 먼저 그곳에 들어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주말이라 전시장은 평소보다 북적였고, 시간의 여유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무작정 ‘김창열’의 이름이 크게 적힌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잘못 들어간’ 길이지만, 오히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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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읽기도 전에 찾아온 건 고요였다. 브로슈어를 펼쳐볼 틈도 없이 전시에 빠져드는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감상에 앞서 강박적으로 정보부터 찾는 습관이 있음에도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저 조용히 스며들었다.

 

* 무슈 구뜨 도(Monsieur goutte d'eau) : 물방울 씨 혹은 물방울 선생으로 번역됨

 

 

 

상흔과 현상 : 김창열에 관하여


 

김창열의 예술에는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 예술가로서의 애환이 깊게 새겨져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재학 중 한국전쟁을 겪었고, 여동생과 많은 친구들을 떠나보냈다.

 

 

중학교 동창 절반이 6∙25 때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죽음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더욱 잔인한 건 무고하게 사라져간 생명들을 보내고 살아남은 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 끝없는 죄책감 속에 김창열은 예술 안에서 그것을 해소하고자 시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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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중에는 번호도 없이 같은 제목으로 그려지는 연작이 많은데, <제사> 또한 그중 하나다.

 

그에게 그림은 곧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가 목도한 죽음에는 턱없이 부족할지라도 그는 묵묵히 캔버스 위에 상처와 구멍을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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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현상>에서는 김창열의 작품 세계의 과도기적 성격이 드러난다.

 

이전까지의 동양적 색채와 미감에서 벗어나 기하학적인 문양과 입체감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뉴욕에서의 고단한 생활이 작품에 투영된 결과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해당 전시관에 들어서면 다른 전시관보다 차갑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틈새로 뚝뚝 흘러나오는 액체 같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이 바로 물방울의 전조(前兆)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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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일어난 일(1972) ©김창열

 

 

‘밤에 일어난 일’은 물방울의 시초가 되는 작품으로 관련된 일화가 유명하다. 작업 중이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 물을 뿌려두었다. 다음 날, 캔버스 위에 맺힌 물방울을 보며, 그것이 평생의 과업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회귀, 물방울로 보다


 

물방울이 처음 그려졌을 무렵, 그것은 아마도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 혹은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방울에 몰두하던 김창열은 점차 그 안에 맺히는 상(像)을 보기 시작했다.

 

투명한 물방울은 비워진 온몸에 모든 것을 담아낸다. 장력으로 응집된 무색무취의 방울은 빛과 그림자, 배경의 색과 질감에 관계없이 자연(自然)스럽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어떤 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생생하고, 어떤 건 멈춰 있는 듯 고요하다.

 

그리고 그 형태를 유지하던 물방울은 상처의 골을 만나면 마치 본래 그 자리를 알고 있었다는 듯 빈틈없이 그 자리를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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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백은 결핍보다 자족에 가깝다. 비워냄으로써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무(無)의 상태. 김창열은 물방울 연작에 이어, <회귀> 작업을 이어간다. 천자문과 물방울을 함께 배치하는 이 시리즈는 그가 생의 후반까지 애착을 가지고 작업했던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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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고, 종종 잘 쓴 글씨로 칭찬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우주의 섭리가 담긴 천자문은 그의 기원이 되는 상징이었다. 김창열은 기꺼이 그곳에 물방울을 얹었다. 마치 돋보기 같기도 한 물방울은 문자의 골격을 따라 번져나갔다.

 

작업 영상 속 그의 노쇠한 몸은 붓을 들기도 벅차 보인다. 손의 떨림을 감추지 못한 채, 그는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물방울을 그리고 또 그렸다. 어쩌면 하나의 고통이 되었을 그 움직임에서 파생된 작품에 이토록 감동한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소리 없이 맺혔다가 사라질 물방울은 김창열의 화폭에 담겨 자리를 지킨다. 누구나 그 앞에 서면, 각자의 상(像)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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