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
장소: 그라운드시소 이스트
기간: 2026.07.17.(금) ~ 2026.11.29.(일)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인류의 기록이다."
이 문장으로 전시는 시작한다.
어두운 입구에 들어서자 천으로 된 커다란 두루마리가 걸려 있다. 타원형 조명이 그 위를 비추고, 그 문장이 떠오른다. 그림보다 먼저 들리는 것은 소리다. 에스닉한 보컬과 강렬한 타악기가 공간을 채우고, 그 밑에 깔린 음울한 사운드가 공포에 가까운 긴장을 만든다. 절벽 끝이나 홍수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한 점도 보기 전에 나는 이미 거친 파도 위의 항해자가 되어 있었다.

그라운드시소 이스트에서 열리는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은 노아의 방주 신화를 모티프로 삼는다. 홍수가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세계에서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이 남은 생명을 구하려 손을 뻗는다. 전시는 '반복되는 이야기', '가면 쓴 아이들', '이어지는 밧줄', '피어오르는 불씨', '세상의 끝자락에서', '누미노제' 같은 장으로 나뉘어 이 이야기를 차례로 따라간다.
벽지 위에 그려진 세계
'가면 쓴 아이들' 섹션의 그림들은 먼저 질감으로 다가온다. 오일파스텔로 겹겹이 쌓은 선이 풀잎 하나, 물결 하나까지 촘촘하게 채운다. 화면에 다가가면 종이가 평평하지 않고 울렁인다. 이 시기 작품들은 버려진 벽지 위에 수채와 오일파스텔로 그린 것이다. 액자 속에서 물결치는 종이는 그 위에 그려진 디스토피아에 현장감을 더한다. 매끈한 캔버스였다면 이 세계는 조금 더 '그림'처럼 보였을 것이다.

화면 속 풍경은 낯설지 않다. 송전탑이 서 있고, 우산을 든 아이와 책가방을 멘 아이가 있다. 재난은 가장 일상적인 풍경 사이로 소리 없이 밀려든다. 그 일상 위에 붉은 몸을 한 아이들이 곰, 돼지, 토끼, 악어 가면을 쓰고 걸어간다. 석상이 늘어선 땅을 지나는 아이들을 그린 작품에서는 특히 화면의 밀도가 압도적이었다.
그림 앞에서 질문이 계속 생겼다. 홍수가 지나간 세계에 왜 아이들만 남았을까. 아이들은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것은 거대한 홍수를 앞둔 지금인가, 아니면 모든 것이 황폐해진 뒤인가. 그리고 왜 아이들은 하나같이 빨간색일까.
방주에 오른 동물, 동물을 구하는 아이들
전시 중반부 '가면놀이(Masquerade)' 연작에서 이 질문의 실마리가 하나 보인다. 원래 신화에서 동물은 방주에 실려 구조되는 쪽이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는 동물의 얼굴을 한 아이들이 오히려 다른 생명을 구하러 나선다.


하지만 이 연작이 그리는 것이 구원만은 아니다. 피에타의 구도를 빌린 장면에서 가면 쓴 아이는 죽은 물고기를 품에 안고 있다. 몸짓은 익숙한 애도의 그것인데, 이 장면은 어떤 구원의 약속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아이가 안은 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채 사라진 생명이다. 가면에 가려 아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피에타 앞에서 으레 떠올리던 감정이 이 그림 앞에서는 쉽게 꺼내지지 않는다.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밧줄
다음 섹션의 이름은 '이어지는 밧줄'이다. 아이들은 손에 쥔 밧줄로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며 묵묵히 걷는다. 빙하가 부서져 떠다니는 바다를 그린 그림에서는 악어 가면을 쓴 아이가 얼음 조각 위에 서 있고, 그 손에서 뻗은 밧줄이 오리 한 마리로 이어진다. 뒤편 빙산 위에는 곰 세 마리가 서 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생명 앞에서는 여럿이 모인다. 기울어진 방주 아래에서 아이들은 붉은 고래를 함께 떠받쳐 끌어낸다. 누구 하나 혼자 버티지 않고, 서로의 팔과 어깨에 기대어 그 무게를 나눠 진다. 여기서 밧줄은 무언가를 묶어 두는 도구라기보다,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생명과 생명을, 아이와 아이를 이어주는 선에 가깝다. 붙잡고 있는 한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약속 같은 것이다.
그래서 전시 후반부 '누미노제'에서 아이들이 밧줄을 놓는 장면은 더 크게 다가온다. 전시의 첫머리에서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걷고, 끌고, 이끌고, 떠받치던 그 손이 '누미노제'에 이르러 처음으로 멈춘다. 아이들은 밧줄을 내려놓고 함께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밧줄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붙드는 도구였다면, 그것을 놓는 순간 아이들은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존재에서 그저 바라보는 존재가 된다. 쓸모를 따지기 전의 시선, 어른이 되면서 조금씩 잃어버리는 경이의 시선이다.
거대한 물, 작은 불씨
밧줄의 장을 지나면 바닥과 벽 전체에 물결 영상이 흐르는 복도가 나온다. 그 끝에서 '피어오르는 불씨'가 시작된다. 벽에는 불꽃 모양의 조명이 떠 있다. 어두운 벽 곳곳에 달린 작은 등은 촛불처럼 위로 은은한 빛을 올려 보낸다. 바로 옆 벽면에서는 물결 영상이 출렁이고 있어서, 공간 자체가 거대한 물과 작은 불의 대비로 짜여 있다. 그림 속에서는 집채만 한 파도 앞에 붉은 아이가 횃불을 들고 서 있다. 압도적인 물의 질량과 손에 쥘 만한 작은 불씨가 한 화면 안에서 맞선다.
불씨 다음에 이어지는 장의 이름은 '세상의 끝자락에서'다. 차오른 물은 땅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 버렸고, 한때 견고했던 배들은 부서져 잔해로 흩어졌다. 그림 속에서는 부서진 나무 더미가 절벽 끝에 쌓여 있고, 그 꼭대기에 아이 하나가 우산을 펼쳐 들고 서 있다. 방주였을지도 모르는 잔해 위다. 세상의 끝자락이라 부를 만한 이 풍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서 있다.
이 장에서 가장 강하게 남은 것은 다시 소리였다. 진짜 재난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음악이 공간을 채웠다. 세 폭의 대형 화면이 둘러선 원형 공간에서도 소리는 그림만큼, 때로는 그림보다 크게 다가왔다.
내일의 낙원, 오늘의 불씨
'내일의 낙원', 그림 대부분이 재난인데 왜 '낙원'일까. 처음 그림 앞에서 품었던 질문이 여기서 다시 돌아온다. 이것은 홍수 이전인가, 이후인가. 어느 쪽이든 낙원은 오늘이 아니라 내일에 있다. 홍수를 앞두었다면 아이들은 방주를 준비하는 중이고, 홍수가 지나갔다면 남은 생명을 이끌고 새 땅을 찾는 중이다. 노아의 방주는 세계가 끝나는 이야기이면서, 남은 생명을 지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디스토피아는 끝이라기보다 끝과 시작 사이의 풍경처럼 보였다.
화면을 가득 채운 파도에 비하면 아이가 든 횃불은 손톱만 하다. 전시장의 빛도 그랬다. 물결 영상이 출렁이는 어두운 공간에서 촛불 같은 작은 등들은 겨우 벽 한 뼘씩을 밝힐 뿐이었다. 그래도 그 빛이 놓인 자리만큼은 어둠이 물러나 있었다. 재난을 이길 만큼 크지는 않지만, 재난 한가운데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 나는 그 빛에서 희망을 보았다.
다만 그 불이 순수한 희망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로메테우스가 건넨 불은 문명을 가능하게 했지만, 같은 불이 세계를 소진시키고 파괴하는 힘도 품고 있었다. 물에 잠긴 송전탑이 보여 주듯, 이 홍수를 불러온 것도 어쩌면 그 불을 먼저 건네받은 어른들의 문명이다. 아이들은 이제 그 불을 다시 건네받는다. 내일의 낙원은 약속된 결말이 아니라, 아이들이 그 불로 무엇을 할지에 달린 질문으로 남는다.

"남겨진 세상을 살아가는 이 어린이들이야말로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작가는 묻는다. 세상의 끝자락에서도 아이들은 서 있었다. 그 붉은 몸이 불의 색인지, 상처의 색인지, 아직 꺼지지 않은 생명의 색인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