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을 좋아한다면 유럽에 방문했을 때 한 번 쯤은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장소들이 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 센터 등이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나 또한 런던에서의 생활과 유럽 여행으로 이러한 공간들을 방문했었다. 그 중 런던과 파리 못지않게 좋은 장소들이 많았던 도시는 베를린이었다.
독일은 베니스 비엔날레 못지않게 국제 미술 제도에서 중요한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가 5년에 한 번 씩 열린다. 한스 하케(Hans Haake)와 플럭서스 그룹에서 활동했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등 오늘날 현대미술 제도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여러 독일 출신 작가들도 있다. 또한,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바탕으로 20세기 현대미술사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실험적 디자인과 건축 예술을 발전시켜 온 나라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로 인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런던과 파리 못지않은 유럽의 현대 미술 허브로 기능하며, 이를 접할 수 있는 다양한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밀집되어 있다. 어느 여행지에서나 현대 미술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유학 중인 J를 만나기 위해 다녀왔던 2번의 짧은 베를린 여행에서 들른 미술관과 갤러리 3곳을 소개하려 한다.
베를린의 국립현대미술관 - 함부르크 반홉(Hamburger Banhof)
함부르크 반홉 전경. 그렇다. 알파벳대로 읽으면 햄버거 반홉이다. 아기자기하지만 붐비지 않아서 좋다. 출처: 직접 촬영
함부르크 반홉은 베를린에서 동시대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기에 매우 좋은 국립 미술관이다. 독일 국내외 여러 작가들과 협업하며 다양한 현대미술 의제를 선보이고 있으며, 국립 미술관이기에 전시의 완성도도 높다.
1884년까지 기차역이었으나 1904년부터 교통 및 건설 박물관으로 운영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심하게 손상되어 1996년에 미술관으로서다시 열렸다. 특히 2022년 베를린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공동인수하며 지금의 국립미술관이 되었다. 성인 기준 티켓값은 16유로지만 학생이라면 할인된 가격으로 입장 가능하다.
함부르크 반홉 앞에 자유롭게 쉬어갈 수 있는 의자들이 있다. 제법 편안하다. 출처: 직접 촬영
테이트 모던의 터빈 홀(Turbine Hall)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Historische Halle(Historic Hall)라고 불리는 메인 홀에서 주기적으로 여러 작가들의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베를린 기반의 체코 예술가 Klara Hosnedlova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작품에 활용된 재료인 소리, 직물, 모래 등의 물성에 대한 작가의 연구가 그가 다루는 동유럽의 역사적 내러티브와 어우러져 그의 작업 세계를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Historische Halle에서 이루어진 Klara Hosnedlova의 “embrace” 전경. 출처: 직접 촬영
“embrace” 전시 도록. 방문객들이 자리에서 읽어볼 수 있도록 배치해 두었으며 아트샵에서도 구입 가능하다. 참고로 나는 김아영 작가님의 도록을 샀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과 사우스뱅크 센터에서 약 25파운드(한화 약 45000원) 상당의 두꺼운 양장본 도록만 보아서 그런 것일까. 12유로(약 18000원) 상당의 휴대하기 용이한 함부르크 반홉의 도록을 보니 머리 속에 김혜자 배우님이 떠오를 정도로 매우 마음에 들었다. 도록의 표지 디자인 또한 일관되게 유지되어 있어 반홉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느껴진다. 출처: 직접 촬영
함부르크 반홉은 Historische Halle 외에도 총 4곳의 전시실에서 특별전과 상설전을 운영하고 있어 전시를 꼼꼼이 보는 편이라면 하루 종일 머무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작가 김아영의 ‘딜리버리 댄서의 선’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 “Many Worlds Over”가 진행되고 있으니 6월 말 중으로 베를린에 들를 예정이라면 이 곳을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갤러리도 빠질 수 없다! - 쾨닉(Konig)과 에스더쉬퍼(Esther Schipper)
런던 못지않게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베를린인 만큼, 국제적 규모의 미술 시장에 참여하는 수많은 갤러리들이 이 도시에 위치해 있다. 추천하고자 하는 갤러리는 쾨닉과 에스더 쉬퍼다. 두 갤러리의 공통점은 한국에도 지점이 있다는 것으로, 한국과 베를린의 지점을 모두 방문하고 분위기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쾨닉은 2021년 서울 청담동에 분점을 개관한 갤러리로,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오도라마 시티’를 선보인 구정아 작가와 같은 해 하반기 아모레 퍼시픽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던 엘름 그린&드라그셋 듀오가 전속 작가로 있다. 특히 옛 교회 건물을 갤러리로 활용하여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기에 건물 자체가 크고 둘러보는 재미가 있어 방문을 추천한다. 전시 관람 후 잠시 머무르기 좋은 카페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쾨닉 갤러리 내부 전경. 탁 트인 넓은 층고로 둘러보기에 쾌적하며, 조각과 설치 작품을 전시하기에도 용이해보인다. Instagrammable하다. 출처: 직접 촬영
쾨닉 갤러리에 설치되어있던 조각 작품. 재미있는 입체 작품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던 갤러리라는 인상이 남이 있다. 출처: 직접 촬영
에스더쉬퍼는 독일 쾰른이라는 도시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현대미술 작가들과 협업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2022년 서울 이태원에 에스더쉬퍼 코리아를 개장 후 한남동으로 확장 이전했다. 대표인 에스더 쉬퍼가 소속 작가들을 한국에 소개할 뿐만 아니라 한국 작가들의 해외 진출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한국 미술시장과의 접점을 강화하겠다고 언급한 바 있다.
리움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던 피에르 위그와 아니카 이, 그리고 한국인 작가 전현선이 함께하고 있는 갤러리로, 갤러리 건물은 쾨닉에 비해 작아서 구경하는 재미는 적지만 동시대 미술 제도와 담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작가들과 지속적인 협업을 유지하고 있기에 방문할 가치는 있다.
베를린에 위치한 본점에 방문했을 때 예상보다 규모가 작고 접근성도 좋은 편은 아니라 살짝 당황했지만, 엄선된 신작들을 전시한 듯한 인상을 주는 넓은 공간과 적당한 설치 간격, 방문객들이 작가를 이해하기에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전시 서문을 통해 전속 작가를 정성들여 지원하는 것이 느껴졌다.
에스더쉬퍼 베를린의 전시 공간 내부 전경. 출처: 직접 촬영
내가 방문했을 때 전시 중이었던 Sun Yitian은 서양의 종교 및 인상주의 회화의 구도를 모티브로 가져와 그녀가 경험해 온 중국 사회를 회화로 표현하는 베이징 기반 작가로, 한병철의 “짝퉁: 중국식 해체론”이라는 책에서도 영감을 얻은 작품도 있다고 한다.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마리아 그림. 출처: 직접 촬영
서양의 회화와 경험에 기반한 중국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작가의 회화 실력과 어우러져 화면 속의 상황이 더욱 극적으로 연출된 작품들이 인상적이었고, 동서양의 문화적 내러티브를 결합하는 젋은 작가들과 협업하여 미술계에 다양한 배경의 작가들을 소개하려는 갤러리의 방향성도 엿볼 수 있었다.
번외: 유대인 박물관
현대미술관은 아니지만 독일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유대인 박물관도 추천한다. 상설전의 입장료가 무료이며, 유대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설계한 건축과 이스라엘 작가 카디시만의 설치 작품 “낙엽”으로 유명하다.
건물 내부에 구성된 대규모의 상설전을 복도를 쭉 따라 유기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설계, 다양한 소장품과 미디어를 통해 유대인의 일상과 핍박의 고통을 깊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낙엽”은 방 바닥 전체가 일그러진 얼굴의 철제 조형물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것들을 밟을 때 나는 쇳소리가 차갑고 기괴하여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의 정서가 전달되는 기분이 들었다.
카디시만의 “낙엽”. 출처: 직접 촬영
아트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박물관의 건축을 모티프로 한 로고 기념품들이 제법 다양해서 하나 정도 구입할 가치가 있다.
평화롭고 잔잔한 도시 베를린
내가 느낀 베를린은 평화롭고 잔잔한 도시다.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소매치기가 적은 편이고 길이 넓어 대부분의 지역이 붐비지 않고 쾌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어도 가능하며 교통 인프라도 좋기에 자유 여행에도 어려움이 없다. 도시를 따라 잔잔히 흐르는 슈프레 강(Spree Fluss)은 바쁘게 지나가는 나의 시간을 잠시 멈추는 느낌이다.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4월에서 9월 사이의 베를린은 특히 날씨가 좋다. 이번 글에서 소개한 전시 공간들을 방문한 후에 슈프레 강을 걷고 노을을 바라보며 슈바인학센과 맥주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면 멋진 베를린 투어가 될 것이다.
내가 먹은 슈바인학센. 맛있다. 출처: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