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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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드디어 프로젝트가 끝났다. 나는 시청역 근처의 본사로 돌아왔고, 돌아온 것은 내 몸과 거취뿐이야. 그 바깥의 것들, 예컨대 나쁜 기억 같은 것들은 가급적 프로젝트 룸에 두고 왔으니까. 물론 완전히 다 떨쳐내지 못한 것들을 다른 글 안에 쏟으며 묻으며 아직도 시간을 쓰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퍽 즐거운 나날이라. 퇴근 후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서울의 한복판에 나는 있고, 그보다도, 퇴근 후 극장과의 거리가 좁혀진 것이 오롯이 좋음이다. 저녁마저 넉넉히 먹고 극장에 도착해, 아직도 더 남아 있는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여유. 미리 극장 앞에 도착해 담배 2개비분의 시간을 넉넉히 피우고, 아직 만석이 못 된 객석에 들어와 외투를 벗어 무릎에 가지런히 두고, 앉은 자리를 두어 번 뒤적대며 자세를 편안히 한 다음, 노트를 꺼내 무릎을 덮어둔 외투 위에 올리어 서론을 써나릴 만큼의 여유가 나는 좋다.
   
그 반대는 말해 무엇할까. 날듯 뛰듯 극장을 깨치고 들어와 좁은 객석을 가득 메운 무릎을 비비며, 하필 사람들 한가운데로 배정된 내 자리에 당도해 외투 벗기를 조심스레 하려는 내 양어깨의 각도란 기하학적이고, 고르지 못한 자세 그대로 앉아 뒤늦게 샘솟는 땀과 헐떡이는 숨소리를 삼키는 송구스런 마음의 옹졸함과 조급함이란. 그때 하물며 담배는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연극이 있는 밤사이를 흐르는 여유가 나는 좋다.

연극이 있는 밤은 아무런 특별할 것도 없는 목요일 저녁을 설레는 것으로 만들어두었다. 마치 잔뜩 기다려지는 약속이 있는 듯한, 어쩜 소개팅이 있는 저녁 같은 그런 나날, 달력에 붉은 별로 표지해 둔 날을 기다리는 모습 같은 나. 평소 이용하지 않는 퇴근길 4호선을 타고 혜화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연옥이었다. 1호선과 6호선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어, 어깨 측면에서만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으니까. ‘여기 사람이 있소, 더는 다가오지 마시오’ 하는 긴장의 경계가 그래도 그 사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주 희박한 여유가 거기 존재했다는 사실을 나는 퇴근길 4호선 안에서 깨달았다. 전후좌우로 사람들의 체온으로 꽉 눌리었고, 셔츠의 얇은 천으로 된 막과 경계를 넘어 올곧이 다가왔다. 그래도 좋다는 것이다, 기다릴 연극이 있다는 것은.

연극 ‘정희’는 혜화 마로니에 공원 뒤편, 예스24 아트원 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따금 온 기억이 있는 곳이다. ‘정희’의 초대가 왔을 때, 마치 ‘이건 꼭 봐야 해’라는 주접 같은 소릴 내지르며 신청 버튼을 누른 까닭은 시놉시스 때문이었는데, 아니 글쎄 ‘나의 아저씨’ 스핀오프라 하잖나. 한편, 하필 서론을 퍽 명랑히 써두어 이런 소위 ‘나의 아저씨’st한 감상이 섞여 들기가 조금 어려워지는데, 대충 이렇게 적고 지나치도록 하자. 무릇 직장 생활이 길어질수록 멜랑콜리아는 자연하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 순간순간마다, 그러한 희미한 행복의 한가운데, 언제, 어느 순간 속에나 약간의 블루가 기다리며 서 있음이라고. 이렇게 서론의 명랑한 무드와 ‘나의 아저씨’적인 감상은 공존할 수 있게 된다, 설명을 위해 이 이상 부러 애쓰지는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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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는 당연히도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건 연극을 안 봐도 비디오이고, 그러므로 이 연극은 주인공 정희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일종 ‘나의 아저씨’ 적인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사리 유추할 수 있다. 이런 기대와 관점을 띈 눈앞으로, 술 취한 정희가 허름한 선술집에 귀가하며 연극은 시작됐다. 그녀는 아주 취한 채 껄떡이며, 텅 빈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곳은 그녀가 운영하는 술집인데, 그녀가 다른 어디에서 취해 이리로 돌아오는 것인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연극이 비추는 그녀의 시간은 이른 아침과 늦은 밤 뿐이라 그 가운데, 즉 일상의 시간은 드러나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달리 표지되지도, 그러니까 ‘이 사이에 무언가 있긴 했는데, 그건 관객 여러분의 상상으로 채워두세요’와 같은 암시조차 없기에 연극의 서사는 매끄러이 이어지지 않는다거나 텅 비어 있는 듯한 감상을 일기도 한다. 한 캐릭터에의 이해를 넘어 몰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캐릭터의 서사가 필요하다면, 그 서사가 대부분 비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빈자리, 부재하는 일상에 자신의 기억을 투사해야만 정희를 가슴 속에 오롯이 들일 수 있다. 나로서는 그렇다. 

연유는 중요치도 그러므로 딱히 필요치도 않아, 눈앞에 드러난 감정 그것만으로 몰입해 들어갈 수 있는 부류의 사람과 나는 사정이 다르다. 그럴 줄을 아는 사람은 진정 위안하는 인간이고, 나 같은 사람은 오직 이해하는 인간이다. 여담을 한 구절 더 붙이자면, 그런 사람이 듣는 실망은 “넌 이해하지 못해”이고, 나와 같은 사람이 듣는 실망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가 된다. 재미있기도 하지. 하지만 나는 ‘위안하는 인간’을 동경한다.
 
정희는 만취한 채 곧잘 쓰러져 눕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세수하고 양말을 벗어 빨래하고, 널고, 독백한다. “인간으로 사는 건 귀찮습니다. 매일 세수를 해야 하고, 때마다 끼니를 밀어 넣어줘야 하며 특히 빨래, 어차피 또 더러워질 것들을 끝없이 빨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세수를 했고? 빨래도 널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망가지지 않은 겁니다. 정정희는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연극은 항상 이런 식이야, 연속성이 없어 뜬금없고, 개연성은 생략돼 자주 과장되다고 나는 여겨. 그래서 난 저기 내 이야기를 넣어두어야 한다. 마치 며칠 전 ‘재미 때까리’ 하나 없는 회식을 마치고 귀가한 내 모습처럼, 까닭과 연유를 알 수 없는 그녀의 취중 염세와 자조의 익숙한 냄새. 그녀의 비어 있는 낮에 회사에서의 내 일상과 회식, 또는 가끔 혼자 술집에서 보낸 쓸쓸함의 기억을 투사해 메꿔두었다. 

최근엔 싱크대에 물이 새기 시작했다. 뿐 아니라 벽에도 바닥에도 축축한 게 묻어나는 것이 아무래도 배관이 터졌나 보다. 그 집은 40여 년 전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때부터 줄곧 그녀의 공간이었으므로, 오랠 대로 오래진 집의 배관이 이제와 터지는 것은 차라리 장하다. 그녀는 오랜 친구 ‘동훈’의 소개로 젊은 목수 ‘가람’을 집으로 불렀고 배관 공사를 하는 김에 낡은 집을 모조리 뜯어고치기로 한다. 건물의 수직하중을 받지 않는 내력벽은 이참에 부수어 햇볕깨나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그녀 얼굴이 밝다. 그리곤 곧 안녕, 내일 봐, 만취, 우울해의 반복. 그 밝음이 노력인들 진심인들 정녕 이렇게 밝을 수 있던 사람이 밤이면 짙은 외로움과 염세로 고꾸라질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속으로 묻는다. 허나, 그래, 설명이 비어 있어 의뭉스럽지만 여전히 그게 사실이긴 하지. 삶은 안녕, 내일 봐, 혼자 마시는 술과, 우울해의 반복이고 그 사이에 반드시 무언가가 끼어들어야만 완성되는 것도, 애초 누군가 설득키 위해 근거를 마련해야 하는 피곤한 것도 아닐 테니까. 

젊은 배관공과 보내는 쾌활한 낮, 그리고 홀로 만취해 집으로 돌아와 우울과 공허를 말하는 밤, 그녀의 시점은 두 가지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고 그 사이는 단절되어 있다. 여전히 왜 그토록 우울해하는지는 다 알 수 없다. 그러자 아리송한 그녀의 우울 너머로 까닭을 말하려는 듯, 그녀의 어린 시절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만취한, 고독한, 중년의, 싱글 레이디는 기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스크린에 찍힌 연도를 까먹었지만 그녀의 나이는 나보다 스무살가량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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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이야기를 달리 짚어댈 건 없지 싶다. 그저 그때 정희와 겸덕과 동훈 세 조무래기들이 있었고, 힘겨울 때 함께였으며, 개중 하나와 풋내나는 첫사랑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겸덕은 대학에 들어서 데모하느라 매일 밤 어딘가 터진 채 돌아왔고, 정희는 그를 간호하며 그만두면 안 되느냐 눈물로 묻고, 애달픔 속에 청사과 같은 사랑만 풋풋이 익어가는 그런, 고전적인 서사. 그러나 바로 뒤잇는 장면 속에서 정희는 동훈에게 길길이 화를 내고 있다. 당찬 골목대장 같은 정희, 꼭 동네마다 한 명쯤 있던, 자기주장과 고집이 센 여장부를 상기시키는 정희. 당장 그 나쁜 새끼를 잡아내고 말겠노라 길길이 날뛰는 정희 옆엔 우유부단하고 익살스런 동훈이 끌려가듯 발발거린다. 

그런데 나는 다음의 주요 서사로 넘어가려다가, 이 대사를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어졌다. 정희는 훗날 동훈을 추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다. 겸덕을 찾기 위해 전국 온 산과 절을 헤집어가며 2주 동안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보냈는데 동훈과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고. 그러나 그 말하는 본새가 어딘가 새초롬하고 뾰루퉁한 것이, 마치 ‘아무 일’이 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고 말하려는 듯했다. 여전히, 앞으로도 영영 여인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너 남친 찾아 삼만 리 중이었잖아, 차마 그걸 건드리면 짐승이지 사람이랴’ 하는 내 심보는 거기 이입한 듯하다. 

겸덕은 대학과 데모를 거치던 와중 급작스런 심경의 변화라도 겪었는지, 갑작스레 회색 장삼을 입고 같은 색의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또, 또 설명 안 하지’ 하면서 벼루어 대다간 그만, 장삼을 입은 ‘김세환’ 배우의 자태에 나는 반해버리고 만다. 무릇 스님을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평온한 눈빛과 속세를 털어내려 애쓰는 몸가짐을 연기하는 것쯤이야 몸짓의 영역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감정의 너머를 바라보는 듯 공 空하고도 따뜻한 내면의 울림을 언어에 담아내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초연하게, 그저 따뜻하게로 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정말이지 그 모든 것의 덧없음을 깨닫고서도, 무의미나 반감이 아닌 평온함을 닮은 무언가. 깨달았노라 기뻐하지도, 자부하지도, 으스대지도 않고 그대로 멈춰있는 듯한 그 무언가. 나는 김세환의 자태에 이렇게 설득되었다. 웃고 있으되 완전히 웃지 않는 눈하며 매달린 주걱처럼 외따로이 덜렁거리는 듯 부자연스러운 그의 턱은, 속세인 연기보다 수행자에 꼭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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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덕은 느닷없이 속세를 떠나 입산했고, 정희는 소식 없이 사라진 겸덕을 찾아 전국 온 산을 뒤집어 기어이 마주했다. 그리고 그의 손목을 잡고서 강제로 끌고 내려오려 한다. 왜 있지 않은가, 기 센 아주머니가 자식을 호되게 혼내기 위해 집으로 잡아끄는 듯, 무언가를 단단히 벼르는 듯한 말투. “따라와. 내려가서 다시 생각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다 필요 없어. 내려갈 거야.” 겸덕은 그 손을 뿌리치고 ‘날 그만 내버려둬,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속세에 있을 땐 내가 다 맞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렇다고 여기서 공부하면 뭘 좀 찾아낼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무어라 말한다만, 여전히 두루뭉술해 비어 있다. 하지만 대충 알 것 같은 느낌. 회사에선 자아를 버리라 하고, 사회에선 개성을 찾으라 하고. 다정한 것을 좋아한다 말해오던 너였건만, 그 여인은 나쁜 남자에게 마음을 주고. 대충 그런, 알 수 없는 이야기들. 

다시 현재 시점, 매일 밤 술에 취한 정희는 아직도 겸덕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나이에 견주었을 때 그녀의 나이 55세. 스물다섯쯤 억지 이별한 사내를 그리워하느라 아직도 저러고 있단 말인가, 것도 매일 밤 술에 잔뜩 취해서? 천 년은 못 되더라도 족히 백 년만큼 오래질 사랑이란, 나로선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 온 몸이 다 아파. 니가 오면 안 아플 것 같아. 그러니까 와. 이제 그만 와. 염소 새끼도 사랑하고, 풀떼기도 사랑하면서, 나는 왜 안 사랑해!” 아직도 이따금 겸덕을 만나러 사찰에 들르면, 스물다섯 그때에 머무른 새초롬하고 뾰루퉁한 마음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쏘아대는 그 사랑엔 정녕 끝이 없어, 그건 오래지는 유순함이 아니라 새까맣게 타오르는 격정이되, 태워도 영영 꺼지지 않는 격정이란 말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다’는 점잖은 말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정희의 사랑은 아직도 20대의 그것으로 남아, 격정과 미움과 원망을 통해 가림없이 드러나는 불꽃 같다. 저렇게 30년을 줄곧 미워할 수 있다니, 그게 나는 의아하고, 그 사랑이 나는 줄곧 궁금하다. 나는 불꽃 같은 마음을 알되, 그 불꽃의 영영 타오름을 아직 믿지 못하니까. 새까맣게 태울 수 있는 것들에는 정해진 양과 기한이 있노라 믿고, 또 그리 알고 있으니까. 마음을 태워 발하는 빛과 온기에는 총량이랄 게 있어, 짧게 반짝이느냐 미미해 오래지느냐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한편 나는 영원한 것들을 꿈꾸고, 그러므로 참으로 느리고 신중하며, 그런 나를 너는 다 기다려 주지 않아, 당연한 것이겠지. 그래서 궁금해, 미칠 정도로. 어떻게 해야 차라리 짧게 소진하고 다 태워버릴 정도로 뜨겁게, 나를 불꽃 위로 내던질 수 있을지가. 그런 내가 감동시키는 사람은 언제나 네가 아니야, 내 서사가 완결되고도 한참이 더 지나 스스로 정리된 때에, 비로소 말이 되어 흘러나오면 그것이 감동시키는 건 너와는 아예 무관한 사람, 남은 평생 너를 볼 일이라곤 없는 내 주변인들뿐이야. 

가람의 보수 공사는 끝에 다다르고, 셋은 공사의 마지막 단계로 함께 벽을 부순다. 그러자 곧 햇살을 닮은 샛노란 조명이 무대로 쏟아져 내렸다. 참으로 예뻤다, 다시 보고 싶을 만큼 예뻤다. 그 이튿날 겸덕은 가게에 들르고 꽃 하나 든 채로 문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정희는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간 아득하게 바라보았고, 드디어 두 사람은 20년 만에 정식으로 마주했다. “여길 왜 못 왔나. 1시간 반이면 오는 데를, 20년 가까이 왜 못 왔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못 왔던 것 같애.” “이젠… 걸리는 게 없니. 나 니 마음에 걸려라, 걸려라 하는 심정으로 괴롭게 살아왔는데, 나 이제 무슨 짓을 해도 네 마음에 안 걸리는 거니? 그럼 나, 이제 무슨 낙으로 사니?” 겸덕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행복하게, 편하게.” 그 목소리가 참 고요해서, 진정 “평안함에 이르러서” 잔인했고 뚫린 벽으로 내리쬐는 샛노란 조명과 패러독스가 밝게 타올랐다. 그 씬은 극 중 최고로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도리어 영원할 수 있었고, 외로움이 그 마음에 끝없는 기름을 끼얹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한편 그런 그녀의 외로움 위로 목수 청년 가람이 나타났고, 그녀의 밤으로 “지안”이 다가왔다. 아, 그 이름이 지안이었다니. 연극을 보고 있을 땐 미처 몰라 그 이름을 지나쳤는데, 어딘가 음울한 “지안”에게 아이유를 투사할 것을 아쉽다. 그랬더라면 두 여인의 외로운 밤, 가로등 불빛 위로 내 상상은 잔뜩 날개를 펼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잠시만, 그렇다면 “동훈”은 이선균이었던 건가? 젠장, 연극을 헛되이 봤군 그래. 나이 든 동훈의 모습은 연극 안에 등장하지 않아, 그저 동훈은 정희의 소꿉친구였고, 더불어 겸덕을 잡으러 온 산 싸돌아다닐 때 그저 옆에서 헤실거리는 익살꾼 소년으로서만 등장했을 뿐,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조력자로 기능한다. 그래서 아예 놓쳐버린 것이다. 

‘지안’은 ‘정희’와 전부터 동네에서 이따금 마주치곤 했었다. 외로운 정희는 어딘가 닮은 듯한 지안에게 마음이 끌렸는지 친한 척을 하며 말추렴을 댔는데, 지안은 갑자기 어느 날 이사를 나갔고, ‘동훈’의 소개로 정희네에 셋방살이하러 돌아왔다. 그러니까 연극의 무대는 후계동인 셈이고, 드라마에서 그려둔 동네의 풍경이 삽시간에 연극의 기억 위로 덧씌워진다. 

‘지안’은 어릴 적 할머니 손에 자랐고 이는 ‘정희’도 마찬가지라, 정희네 앞에 놓인 벤치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여인이 참 닮았다. 정희는 지안이 자신에게 와주어 고맙다고 말한다. 더 이상 밤이 외롭지 않다고,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지안도 마찬가지, 지안은 밥 끓이는 냄새와 저녁상을 차리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아마 좋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 좋다. 비록 연극의 시간은 짧아 두 사람의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이별의 순간 귀에 익은 대사를 남긴다. “설에는 어디가? 나도 갈 데 없는데 우리 일 년에 두 번만 만날래? 설하고 추석에.” 그리고 곧 엔딩이 내렸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제대로 보아둘 걸 그랬어. 유튜브 몰아보기로 봐둔 드라마의 편집된 기억 속엔 ‘정희네’의 노란 간판과 ‘정희’가 온전치 않았고, 이제와 다시 보고 있으니 내가 놓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알겠다. 그렇게 토요일 종일을 드라마로 보냈다. 정희와 겸덕, 지안과 동훈, 기훈과 유라, 오랜만이었다. 드라마를 다 보고 글을 이어서 쓴다. ‘정희네’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적요하고 우울한 공간만은 아니이고 내가 본 ‘정새별’ 배우의 정희, 우아하고 고풍스러우며 우수에 젖은 듯 고요한 저 여인은 발랄하고 발칙한 ‘오나라’의 정희, 드라마가 깊이 조망해두지 않은 그녀 혼자만의 밤이자 그림자였구나 싶다. 연극의 서사는 비어 있던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극 중 핵심 대사 및 장면을 고스란히 재회했고, 그 사이의 중간 서사는 원전에 다 들어있었다. 

무엇으로 연극에의 기억과 이 글의 마지막을 매듭지어 볼까. 아무래도 나는 노란 햇살이 비치던 겸덕과 정희의 풍경을 상기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뜨겁게 사랑하는 것들은 언제나 내 가슴을 동경으로 가득 채우곤 해. 그게 내 안에 솟지 않아 멀고, 그래서 의아하고, 한사코 가슴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아 튕겨 나가지만, 한 번 미치어 와닿으면 언제나 그래. 이에 관하여 할 말이 너무 많다만 아직 나는 할 수 없고, 그게 미치겠고, 그래서 나는 빨갛게 태워버리거나 가슴 터질 듯 외치고 싶다. 나는 느려도 너무 느리고, 그것보다도 한참은 더 느리니까. 나는 말을 잘 못하는 반면 글 속에서만 유창하던 까닭은, 하여 글로써 나를 먼저 안 사람이 말에 있어 의아해하던 까닭은, 내가 언제나 느리기 때문이었으니까. 얼마나 쓰고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친 다음에야 글이 완성되는지, 그렇게 긴 시간을 할애하고도 조금 더 할애한 끝에 이 안에 내가 담기던지는 오로지 나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차라리 마음껏 터트리고 틀리고 싶다, 따지자면 개중 겸덕에 가까울 나의 마음, 허나 그 반대편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정희의 사랑이 그러한 것처럼. 다만 어느 쪽도 괜찮지 않다는 말을, 그러니까 이쪽이든 저쪽이든 마음 편히 괜찮은 선택지 따위 없었다는 말을 나는 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나도 겸덕이 그러했던 것처럼 평안에 이르러야 하나, 삼키고 누르기를 반복해 기어이 잊고 뛰어넘는 어느 순간까지, 그저 늘 해왔던 방식대로,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 미리 정해진 그 미래로 나아가야 하나? 하지만 나는 승려가 아니라서 그리는 못하겠고, 그래서도 안 될 것 같다. 이 주제에 있어 평안에 이르는 것이 나는 두렵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다’라는 고린도전서의 말을 나는 좋아해 왔다. 그건 평안과도 상통하는 것. 그러나 이 땅 인간의 사랑이란 뜨겁고, 사실 그와 정반대로, 사랑이 인간을 뜨겁게 하는 것이며, 그 데일 듯 뜨거움이 우리를 광기와 살아있는 감각의 정중앙, 불길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뜨거움에 괴로워하는 자는 고요함을 갈망할 테나, 한편 고요한 사람이 다시 뜨거움을 그리워하는 것 또한 자연하다면, 나는 완전한 평안에 이르는 것이 두렵다. 

사랑이란 사실 정의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어떤 사랑에 있어 평안이 곧 좋음이 되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한 평안은 멈춤에 가깝기에, 그것은 또 하나의 사랑이 종막에 다다랐음을 뜻한다. 사랑의 끝은 이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이별하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는 것처럼, 사랑을 가장한 채로도 이미 다 끝나버린 것들이 있었으므로, 내게 그것은 관계의 외형이 아닌 오직 뜨거움의 유무로 설명되는 것이다. 

관계의 외형이 중요한지조차 점점 더 모르겠어. 결혼한들 그것은 곧잘 끝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동훈과 바람난 그의 부인처럼 관계는 끝없이 변화하고 진동하는 것이 아니인가. 그러므로 진행상의 관계란 무언가 결론지어지지 않은 채 끝없이 진동하는 상태이며, 진정 이별이란 그 반대의 것, 즉 완전히 멈춰버린 진동을 가리킴이 아니인가? 그래서 고요한 평안에 이르는 것이 싫고, 반면 마음은 점점 더 고요해져만 가기에 나는 두렵다. 그래서 30년 동안 타올라 마침내 다 타버린 정희와, 30년을 묻고 인내해 마침내 다 썩혀버린 겸덕의 모습, 마침내 평안에 이른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다워서 나는 싫고, 두 사람의 대비가 시리게 역설적이라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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