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구성된다. 역사가는 멈춰 있는 사람의 앞모습이 아니라 나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기록한다. 때로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앞모습보다 많은 것을 알려주니까.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을지라도 주먹을 꽉 쥔 채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 등이, 그 용기가 그 사람을 정의해줄 테니까.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엔 뒷모습이 두 번 등장한다. 실패할 거사에 투입되는 1940년대 서점 주인 양희의 뒷모습, 시위 현장으로 뛰어드는 1980년대 학내 방송국 기자 나라의 뒷모습. 나라와 함께 기자를 꿈꿨던 해준은 멀어지는 나라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탕. 그리고 총소리가 뒤따른다. 해준이 찍은 뒷모습은 나라의 마지막 순간이 된다. 해준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그날 내가 했던 선택을 몇 번이고 구"긴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시 돌아가면 반드시 말릴" 거라고. 그때 그의 앞에 나라와 똑 닮은 누군가가 나타난다. 자신의 목숨보다 대의를 중시하는, 1940년대의 양희가. 해준은 이번에야말로 양희를 말릴 수 있을까.
해준은 양희를 끝내 살릴 수 있을까.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은 연애 소설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에 보태는 1940년대 양희와 기자를 꿈꿨던 1980년대 대학생 해준이 책을 통해 만나는 타임워프물이다. 6월 21일까지 극장 et theatre 1(구 눈빛극장)에서 공연되며 박새힘·이봄소리·이지수·윤은오·임규형·정욱진이 출연한다.
작품은 양희가 서점 손님에게 연애 소설을 소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누군가는 사랑 이야기가 가볍다고 질책하겠지만 양희는 그럴수록 "더 텅 빈 여자 되어 상상 속 연애를 떠"든다. 그때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양희는 손님들을 비밀 통로로 안내한다. 1940년대엔 우리말로 된 책을 사고파는 것이 불법이었으니까. 손님들이 떠난 서점에 중절모를 눌러쓴 한 사내가 찾아온다. 양희는 책을 판 돈을 그에게 건네준다. 사내는 양희에게 거사 일정을 알리고 떠난다.
온통 책뿐인 무대에 연기가 퍼져 나온다.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일자형 조명이 무대를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훑는다. 무대 위엔 긴장이 흐르고, 시대는 1980년대로 전환된다. 연기가 자욱한 서점 안으로 체크 셔츠를 입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나라와 카메라를 든 해준과 뛰어 들어온다. 나라는 "이번 시위 네가 제보한 거니까 같이 나가는 거다?“라 익살스럽게 묻더니 시위 인파로 뛰어 들어간다. 그리고 들리는 총소리. 글 초반에 언급한 상황이 재현된다. 나라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이곳, 서점으로 돌아온 해준은 결말이 완성되지 않은 소설 한 권을 발견한다.
남자는 알고 있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그 많은 친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남자는 매일밤 그날로 돌아가 그녀를 만난다.
폐허가 된 거리로 뛰어려는 여자는 자신을 말리는 남자에게 매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진 모르지만….
해준은 그 아래에 이렇게 적는다. "여자가 폐허가 된 거리로 뛰어든 이유는 자유를 믿기 때문이었을까?" 이 물음을 계기로 해준과 양희의 40년을 오가는 필담이 시작된다. 둘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계속 엇갈린다. 시대의 간극을 느낀 해준은 고백한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양희가 해준의 말을 믿지 않자 해준은 당시 신문 기사를 줄줄 읊으며 예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낸다. 자신이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1980년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양희는 곧장 묻는다.
독립. 양희가 가장 궁금했던 건 독립이었다.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식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해준이 1945년에 독립이 되었다고 답하자 양희는 기뻐하더니 또 묻는다. 독립이 되었으니 이제 모든 게 괜찮아졌냐고. 해준은 망설인다. 해준이 살고 있는 80년대는 괜찮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해준은 모든 게 괜찮아졌다고 답한다. 양희가 실망하지 않길 바랐으니까. 양희에게서 나라의 모습을 본 해준은 다짐한다. 양희가 선배처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이번 선택만큼은 구겨지게 하지 않겠다고. 해준은 양희가 함께하는 거사가 실패했다는 기사를 발견하고 양희를 말린다. 실패를 성공으로 돌리기 위해 계획을 수정해 보지만 그럴수록 사건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양희는 멈춰서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일이 결국 실패할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해준은 스스로 묻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실패할 일에 뛰어들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운명론적인 질문에 양희는 이렇게 답한다. "폐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국 해준은 양희를 말리지도, 살리지도 못한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양희의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로 찍을 뿐이다. 그의 카메라는 두 번의 죽음을 담았다. 첫 번째 죽음은 해준에게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두 번째 죽음은 트라우마를 해방으로 이끈다. 나라의 마지막 뒷모습을 찍은 건 비자발적인 사고였지만, 양희의 마지막 뒷모습을 찍은 건 자발적인 선택이었으니까.
이 작품은 누군가의 단단한 뒷모습뿐만 아니라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다룬다. 차마 가지 말라고 붙잡지도, 완전히 가버리라고 밀어줄 수도 없는 마음과 망설임과 후회를. 누군가를 붙잡던 힘은 결국 그대로 누군가를 밀어주는 힘이 된다. 가장 강한 추진력은 가장 강한 억제에서 비롯되니까. 이는 사랑의 개념으로 연결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그를 지키기 위해 그의 행동을 막는 것이 아니다. 그가 살아생전 꼭 이루고자 했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전태일이 세상을 떠난 후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선언하며 평생 노동운동에 힘썼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처럼. 양희의 뜻을 이어받아 '아시타서림'을 '내일서점'으로 바꾸고 서점 주인이 된 해준은 미완이었던 소설의 마지막을 완성한다.
여자는 폐허가 된 거리로 뛰어려는 자신을 말리는 남자에게 매번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진 모르지만,
당신은 내가 살았던 이 같은 세상에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닿을 수 없는 당신의 세상에 내 글을 먼저 보냅니다.
시간이 더디 걸리더라도 당신에게로 가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슬퍼 말고 해피 엔딩으로 기억해줘요.
함께한 시간으로 충분했던,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그렇게 양희의 내일은 해준의 오늘이 된다.
*
그곳은 독립이 되었습니까?
극이 끝나고도 이 질문의 울림은 멈추지 않았다. 세상과 국가가 어떻게 될지보단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를 궁금해하는 시대에, 독립만을 궁금해했던 양희를 아주 오래 생각했다. 그곳은 지금보다 평안하냐는 양희의 물음에 거짓으로라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해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1980년대의 해준이 2020년대의 우리에게 "그곳엔 민주주의가 있느냐"고 물어도, 우리는 똑같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답할 테니까. 당신들이 갈망했던 민주주의가 도래했다고 말이다. 그 안에서 또 문제가 생겼고, 지금은 문제를 열심히 풀어가고 있으며, 이곳에도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꾹 삼키겠지만.
1940년대의 양희가 질문하면 1980년대의 해준이 답한다. 1980년대의 해준이 물으면 2020년대의 우리가 답한다. 2020년대의 우리는 40년 후의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싶을까. 40년 후의 '우리'는 어떤 반가운 소식을 전해줄까. 반가운 소식 뒤로 꾹 삼켜진 말은 무엇일까. 분명한 건 하나다. 그때도 지금처럼 아주 소란스럽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서림 어딘가에 미완된 소설책으로 꽂히리라는 것. 그 책은 반드시 40년 후의 '우리'가 완성해 주리라는 것.
그렇게 우리의 내일은 우리의 오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