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동화적 세계에 숨겨진 '이산'의 풍경
서경식 작가는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외적인 이유에 의해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과 그 후손’으로 ‘디아스포라’를 정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 속 인간들에게 들키면 떠나야만 하는 아리에티 가족의 숙명은 디아스포라의 삶과 맞닿아 있다. 아리에티의 가족은 10cm 크기의 작은 종족인 소인족이다. 인간과 똑같이 생겼지만 크기만 작은 소인이라는 설정은, 우리 사회의 ‘작은 존재들’을 가시화한다. 구체적인 소수자성이나 난민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마루 밑 아리에티>는 특정성보단 보편성을 택해 범위를 넓혀 바라봄으로써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며 작품을 볼 수 있게 한다.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아리에티의 거주지인 ‘마루 밑’은 ‘마루’라는 독자적인 영토가 아니라, 그 ‘밑’이라는 거대한 인간 사회의 ‘주변부’에 해당한다. 일반적인 디아스포라가 이주 후에도 언젠가 돌아갈 ‘원형적 고향’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애초에 돌아갈 영토가 없거나 명확하지 않다. 소인족은 인간의 눈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주를 준비해야 하는 ‘영원한 이방인’의 상황에 처해 있다.
다소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영화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지나치게 무겁게 묘사하는 것을 경계한다. 아리에티가 사는 집을 비롯한 생활환경을 그리는 방식은 색감부터 아기자기하고 따뜻하다. 또한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쇼우가 시골로 내려와 아리에티를 만나며 삶의 의지를 다지고 다시 돌아가는 구성은 한편의 동화를 본 듯한 감상을 남긴다.
Ⅱ. ‘빌려 쓰는’ 삶과 다수자의 폭력성
소인들은 인간의 물건을 가져다 쓰는 행위를 ‘빌린다’라고 표현한다. 인간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행위가 기생 혹은 도둑질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어디까지나 동등한 위치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때 성립한다. 소인들의 경우 인간들의 물건을 빌려오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수자가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생활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아스포라 집단이 주류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규범을 지키듯, 소인들은 ‘빌려 쓴다’라는 규칙을 세대 간에 전수해 왔다. 소인들이 자신을 ‘빌려 쓰는 사람 (Borrower)’이라 정체화하는 것은, 거대한 주류 사회를 살아가는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주체성을 지키는 불가피한 생존 방식이자 적극적인 ‘문화적 저항’인 것이다.
아리에티가 물건을 빌리는 과정을 목격한 쇼우는 아리에티의 가족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방에 있던 인형의 집 부엌을 통째로 마루 밑에 밀어 넣었다. ‘인형의 집’은 언젠가 다시 만날 소인들을 위해 만들어둔 것이었기에 쇼우는 자신이 처음으로 만난 작고 아름다운 아리에티에게 그 집을 선물처럼 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하게만 보이는 호의는 결국 아리에티 가족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하루 아줌마에게 발각되어 이주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러한 쇼우의 행동은 흔히 발생하는 ‘당사자의 주체성이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시혜적 태도’와 관련이 있다. ‘진정한 도움’이란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대화와 조율에서부터 시작한다. 쇼우가 미성숙한 소년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아리에티에게 의견을 묻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선의에도 불구하고 폭력성을 띠게 된다는 점은 분명 주의를 요한다. 즉, ‘동의와 주체성 존중의 부재’가 문제의 핵심이다.
한편 하루 아줌마는 쇼우의 눈을 피해 소인의 흔적을 쫓는 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소인을 발견하자마자 대화와 이해를 시도하기보다는, 병에 가두고 쥐 박멸 업체를 불러 나머지도 포획하려고 한다. 이는 생포를 지시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악의적 살의’라기보단 소인을 봤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해 줄 수단으로 여기는 ‘도구적 대상화’에서 기인한 것에 가깝다. 하루 아줌마가 소인을 대하는 태도는 놀이터에서 곤충을 채집해 뜯어보는 아이들처럼 타자를 대상화하여 도구적, 놀이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폭력이다.
결과적으로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가장 이상적인 ‘존중’을 보여주는 것은 쇼우의 외할머니 사다코다. 소인들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억지로 개입해 찾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며 스스로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Ⅲ. 멸종의 운명론에 맞서는 연대
영화는 휴지를 ‘빌리려는’ 시도 중 쇼우에게 들키기 전까지, 14살이 된 아리에티가 아버지와 함께 여정을 준비하고 물건을 빌리는 일상을 보여준다. 못을 박은 자국은 디딜 계단이 되고, 옷핀은 칼이 되며, 테이프는 등반 시 이용하는 찍찍이가 된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영화 제작자가 떠올린 기발한 발상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사물을 재발견하며 살아가는 소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증명해 주는 수단이기도 하다. 거대한 세상에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실존적 불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디아스포라의 자생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너희 종족은 멸망할 것”이라는 잔인한 현실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한다. ‘인간’이란 다수자를 피해 흩어질 수밖에 없던 소인들에게 ‘멸망할 운명’이라 확신하는 쇼우의 태도에는 더 높은 권력을 가진 자만이 행할 수 있는 무관심과 무책임이 깔려 있다. 이에 대항해 아리에티는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우린 여기서 살 수 있었어! 우리 종족은 그렇게 (위험을 피해 이사를 하며) 살아. 다들 열심히 사는 걸 너희가 모르는 것뿐이야!”라고 반박한다. 소인들이 겪는 불안은 인간들에게 정체를 들켜선 안 된다는 ‘금기사항’으로 드러나고, 정체를 들키는 것은 곧 ‘멸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립된 삶을 홀로 유지하던 아리에티 가족에게 야생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소인 ‘스피라’와의 만남은 엄청난 전환점이 된다. 주류 사회의 언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스피라의 존재 자체, 그리고 ‘우리 말고도 동족이 있다’라는 사실은 아리에티에게 엄청난 심리적 위안을 준다. 이사를 돕는 스피라의 모습에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서로를 돕는 하나의 방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저 너머의 세상을 본 존재인 스피라 덕분에 이주가 수월하게 가능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연대’가 공동체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느끼게 된다.
Fin. 진정한 이해를 향한 끝없는 유랑
주전자를 타고 아리에티의 가족이 이사를 가기 직전, 쇼우는 마지막으로 아리에티를 만난다. 작별 인사를 하며 쇼우는 각설탕을 내어주고, 아리에티는 자신이 머리를 묶고 있던 클립을 손가락에 얹어준다. 배려를 배운 쇼우와 배척을 거둔 아리에티는 이 순간 서로의 증표를 교환하며 우정을 확인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성장과 이별은 ‘그들의 짧은 우정은 존재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으며, 서로를 향한 진심만이 세상을 연결한다’는 한 언론의 평론*이 말한 것처럼, 지브리 특유의 휴머니즘적 메시지를 남긴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해피엔딩도, 새드엔딩도 아니다. 그렇지만 아리에티가 그곳에 계속 머물지 못하고 떠났다는 점만큼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소인들이 또다시 밀려나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열린 결말로 제시하며, 현대 사회에 잊히고 소외되는 약한 자들을 향해 은은한 시선을 보낸다. 함부로 결론짓지 않음으로써 누군가는 ‘우리 사회의 작아지는 존재들’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바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바람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선 - 서로의 존재를 알아도 끝없이 유랑해야 하는 디아스포라적 세상에 정착하기 위해선 - ‘진정한 이해와 포용’이 필요할 것이다.
*메디먼트뉴스, 이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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