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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너의 내면을 시추하는 힘,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너의 고통을 인정해

by 김나윤 에디터
2026.09.0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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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태이 페어컷_풀샷.jpg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키키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공연제작소 작작)는 뮤지컬 <실비아, 살다>의 창작진인 조윤지 작가 겸 연출, 김승민 작곡가의 작품이다.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생애를 따라가며 내면의 고통을 그려냈던 정공법으로 이번에는 키라 밴 겔더의 저서 <키라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를 무대화했다. 뮤지컬은 '키키'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경계성 인격장애의 치료 과정을 따라간다.


      키키는 경계성 인격장애로 진단받은 인물이다. 불안정한 대인관계, 부적절하고 심하게 화를 내는 것, 버림받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하는 것,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불안정성, 만성적인 공허감 등은 경계성 인격장애의 특징으로 지목된다. 이는 얼핏 현대인 일반이 겪는 보편적인 문제 같다. 그러나 정신의학계에서는 전문의의 정확한 진단을 토대로 경계성 인격장애를 치료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칫 '그냥 성격이 이상한 사람' 정도로 치부되기 쉬운 분위기 속에서, 키키와 같은 누군가는 고통을 인정받지 못한다.

       

       

      [사진자료] 키키_공연 사진_1.jpg

       

       

      그래서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토크쇼의 형식으로 작품의 얼개를 꾸렸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진 키키가 자신의 치료 과정을 직접 발화하는 것이다. 키키라는 한 사람의 시점을 통해, “마음의 피부가 벗겨져” 있는 그가 주변의 자극에 “앗 따가”하는 모습을 관객이 함께 느낄 수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키키의 고통을 이해시키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을 취한 셈이다.


      작품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구성되지 않는다. 4단계의 치료 과정이 분절적으로 펼쳐지는데, 키키는 어느 단계에서 도약하는 것 같다가도, 다음 단계에서 바로 무너지고 만다. 새로운 연인과 안정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다음 단계에서는 연인에게 버림받을 것 같다는 상상에 괴로워하는 식이다. 이는 치료를 완성이 아닌, 과정으로 보게 하며 그럼에도 "분명히 나아지고 있다."라는 느린 변화를 좇게 한다. 키키는 상담과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자해 충동이 들 때면 면도칼 대신 얼음을 손에 쥐고, 느리지만 한 걸음씩 나아간다.

       

       


      이곳의 주인공은 너


       

      캐릭터 플레이 역시 키키 한 사람의 내면을 보여 주는 데 집중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로지 키키뿐이고, 호스트들은 다른 인물, 소품 등을 번갈아 가며 맡는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을 세울 때, 많은 공연이 '관념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과는 다른 선택이다. '키키 1', '키키 2' 혹은 '버림받을까 봐 힘들어하는 키키', '변하려는 키키' 등으로 키키의 일부를 여러 배우가 연기할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은 키키 한 명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정공법을 택한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나타나는 '화염 방사기' 또는 어린 시절의 키키가 잠깐 등장하기도 하지만, 장면의 포커스는 이들을 바라보고 감당하는 키키에게 있다.


      한 사람에게 포커싱되어, 한 사람의 화술로 전달되는 극인지라 서사적인 긴장과 이완이 유연하지는 않다. 심지어 러닝타임은 120분. 소극장 뮤지컬치고는 꽤나 긴 러닝타임인 바, 오랜 시간 한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많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전형적인 서사 구성이 아니라는 점도, 주인공이 쉽게 변하기를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러나 깊이 몰입할 만큼 러닝타임이 팽팽히 당겨져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사진자료] 키키_공연 사진_2.jpg

       

       

      음악은 다양한 장르로 꾸려져 있는데, 이러한 점을 완화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서정적인 테마의 음악으로 진행된다. 키키를 바라보는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 반영되었다. 이 외에도 유로 디스코, 헤비메탈 락, 가스펠, 힙합 등이 군데군데에서 튀어나오며 작품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키키와 엄마(혹은 아빠)의 갈등을 다루는 넘버 '우리가 고통을 다루는 법'은 뮤지컬 <틱틱붐>의 ‘Therapy’를 오마주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오래, 직접적으로 키키라는 인물의 내면을 보여 준 덕에 키키에게는 구체성이 생긴다. 때때로 어떤 작품은 인물이 가진 '이미지'가 인물 개인의 캐릭터성을 압도하기도 한다. 혹은 키키라는 이름 대신 어떤 이름을 넣어도 될 만큼 캐릭터 고유의 고통이 보편적인 것으로 쉽게 확장되기도 한다. 분명 이 작품은 ‘경계성 인격장애’를 중심으로 키키라는 인물을 표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키키는 '경계성 인격장애'로만 설명되지 않고, 누구나 쉽게 투사할 수 있는 고통과도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한다. 작품의 제목처럼 경계성 인격장애인 ‘키키’가 아니라,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로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다.

       

       


      ‘파묘’의 시대에 허구가 할 수 있는 일


       

      최근 뉴스 헤드라인에서 ‘파묘’라는 단어를 자주 마주한다. 요즘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파묘’는 무덤을 파헤치듯, 과거를 다시 발견하고 그것을 현재로 소환하여 재의미화하는 것에 가깝다. 물론 한 사람의 과거 행적, 발언 등을 되짚는 것은 어떤 때에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 <파묘>에서처럼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험한 것’을 꺼내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명목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이 ‘파묘’가 공동체를 위한다는 정의감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면서 느끼는 즐거움 때문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전자로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후자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의미한다. 최근에 '파묘'와 비슷한 맥락에서 함께 사용되는 '나락 가다'라는 표현의 기저에도 같은 의미가 담겨 있지 않나 하는 고민이 생긴다. 누군가의 사회적 지위, 호감도가 한순간에 떨어질 때 그 낙차를 비웃는 것. 그것을 내심 기뻐하는 것. 누구도 멸균된 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부족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파묘’와 '나락'이 마냥 속 시원하지는 않다.

       

       

      [사진자료] 키키_무대사진.jpg

       

       

      우리는 나아가야 해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때론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만

      뛰고 또 달리고 춤을 추면서

      에이 에이 에이 에이

       

      - M10. '우리는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중에서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와 같은 허구의 이야기들은 그 ‘파묘’의 힘을 개인의 내면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 내면의 복잡함을 시추해 낸다. '파묘'의 힘으로 키키를 바라보면 어떨까? 그가 불건강한 연애로 상대를 힘들게 했던 일, 첫 출근날 못 하겠다고 뛰쳐나가 버렸던 일 등이 드러날 테다. 반면 내면으로 향하는 시추는 그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나는 저렇게 행동한 적 없지만(혹은 나도 그런 적이 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넉넉한 이해심을 건져 올린다. “너의 정당성을 인정해.” “너의 고통을 인정해.”라는 작품의 노랫말이 울림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갈수록 '나'와 '너'의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겨우 모음 하나가 다르지만, 그 사이에는 각자가 살아온 시간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건 누가 경계성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고, 누구는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처럼 타인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그 이해 불가능 속에서도 자신만은 이해받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때 좋은 이야기는 처음 만나는 타인의 내면으로 아주 약간이나마 들어가 보게 한다. 내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이웃도 아닌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지,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게 한다. 작품의 결말부에서 키키가 치료의 '완성'이 아닌, 치료의 '과정' 속에 있듯이.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겠지만, 조금씩 나아가려는 마음을 안고,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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