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518738-1.jpg

 

 

예술가로서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재능, 노력, 운이다.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성공은커녕 예술가의 삶을 지속하기조차 힘들다. 불규칙한 수익, 불안한 마음을 견딜 수 있는 경제적 기반도 있으면 좋다. 부모님이나 배우자에게 기대든, 다른 일을 하며 수익을 창출하든 돈이 있어야 예술을 할 수 있다. 생존은 예술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 예술가로 생존하기 위한 준비물은 무엇일까. 여성성과 남성성이다. 여성성을 예술로 녹여내는 능력과 필요할 땐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기질을 발휘하는 힘도 필요하다. 뮤즈 또한 창조를 위한 동력 중 하나다. 그 뮤즈는 현실 연인이나 배우자, 혹은 자식일 수도 있다. 끝내 이뤄지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평생을 품은 사람은 더 애틋한 뮤즈가 된다.


재능, 노력, 운, 경제력, 여성성과 남성성, 배우자와 자식, 연인, 평생 잊지 못한 뮤즈까지 전부 다 가진 채 한 번뿐인 생을 뜨겁게 불태우다 간 예술가가 있다. 그는 ‘아르데코의 여왕’, 폴란드 출신 화가 ‘타마라 드 렘피카’다.


재능과 야심이 넘쳤던 렘피카는 과감한 작품을 쏟아내며, 자신 또한 계산적으로 연출했다. 여성과 남성 모두를 뜨겁게 사랑한 그는 뮤즈들을 캔버스 속 그림으로 탄생시켰다. 그는 격동의 시대에서도 붓이란 칼을 들고 적군을 무찌르며 살아남았다. 그의 적은 여성 예술가를 향한 편견, 구시대의 낡은 가치관, 혁명·망명·전쟁 등 쉴 새 없이 뒤바뀌는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news-p.v1.20260323.078a2a1f4d084e798d83d71769c7243d_P1.jpg

 

 

2026년 3월 21일, 서울 코엑스 아티움 우리은행홀에서 한국 초연이자 아시아 초연 뮤지컬 <렘피카>가 개막했다. 6월 21일에 막을 내리는 뮤지컬 <렘피카>는 타마라 드 렘피카의 생과 사랑, 예술 세계, 그가 살았던 시대상을 강렬한 음악과 모던한 무대로 그려나가며 연일 화제 몰이 중이다. 2011년부터 개발 과정을 거친 <렘피카>는 2024년 브로드웨이에서 두 달간의 공연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신작이다.


렘피카 역엔 김선영, 박혜나, 정선아가 캐스팅됐으며 렘피카의 뮤즈이자 연인 라파엘라는 차지연, 린아, 손승연이 연기한다. <렘피카>는 내로라하는 노래 실력과 연기력, 굵직한 이력을 가진 최고의 여배우들을 캐스팅해 개막 전부터 큰 화제가 됐다. <위키드>,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데스노트>, <보디가드> 등의 대형 뮤지컬에 출연해 온 이들은 출연작 상당수가 서로 겹친다. 이처럼 검증된 작품들에서 오랫동안 실력을 증명해 온 이들조차 새롭고, 쉽지 않다며 입을 모으는 작품이 <렘피카>다.


개막한 지 이제 한 달 된 낯선 작품임에도 렘피카 대표 넘버 ‘Woman Is’, 라파엘라 대표 넘버 ‘Don't Bet Your Heart’, 렘피카와 라파엘라의 마음이 오가는 넘버 ‘Stillness’, ‘The Most Beautiful Bracelet’, 마리네티 대표 넘버 ‘Perfection’, 렘피카·라파엘라·타데우스·마리네티의 격정적인 말들이 교차하는 넘버 ‘Speed’ 등은 중독적인 멜로디와 강렬한 감정선, 감각적인 가사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 최고의 디바들을 한자리에 모았는지 이해가 가는 고난이도 넘버들은 관객에게 극한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518738-2.jpg

 

 

에펠탑을 형상화했지만, 위층에서 볼 땐 렘피카가 인생이란 파도를 항해할 때 탄 배 같기도 한 철골 구조물 무대 또한 심플하고 모던하다. 렘피카의 작품을 활용한 무대 예술 또한 미술관 못지않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라파엘라와 밤을 보낸 렘피카가 부르는 ‘Woman Is’, 즉 1막 엔딩 후 무대 막 전체를 뒤덮는 작품 ‘아름다운 라파엘라’는 시선과 감정 모두를 압도한다.


<렘피카>는 경력이 오래된 배우들의 이미지 및 극 중 캐릭터의 젠더적 편견을 보기 좋게 뒤집은 작품이기도 하다. 렘피카 역 정선아는 라파엘라 역 차지연과 함께 출연한 유튜브 <조현아의 평범한 목요일 밤>에서, <렘피카>에선 자신들의 기존 이미지와는 반대 격인 역할을 맡아 새롭다고 밝힌 바 있다.


정선아는 묵직한 존재감과 괴물 같은 노래 실력, 소녀와 노인을 넘나드는 폭넓은 연기를 선보이며 주인공으로서 극을 이끌어 갔다. 아름다움이 개연성인 라파엘라를 연기하기 위해 비주얼 관리에도 큰 신경을 쓰고 있다는 차지연은, 렘피카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은 뮤즈이자 연인인 라파엘라로 완벽하게 변신하며 무대를 압도했다.


네 인물의 날카로운 감정이 교차하는 넘버 ‘Speed’에선, 렘피카 남편 타데우스가 ‘선택해. 그 여자(라파엘라)야, 나야’라고 쏘아붙이는 부분이 있다. 이런 말은 수많은 작품에서 주로 여성의 것이었다. 삼각관계는 매우 흔한 소재지만, 여성과 남성을 모두 사랑한 여자 렘피카가 남편과 동성 연인 가운데에 자리하니 젠더 편견은 아무렇지 않게 뒤집힌다. 렘피카라는 한 여자를 두고 남편 타데우스와 연인 라파엘라가 신경전을 벌이는 ‘What She Sees’ 넘버 또한 기존 삼각관계 로맨스와는 ‘다른 맛’을 준다.

 

 

20260109500360.jpg

 

 

렘피카의 연인이자 뮤즈인 라파엘라는 거리의 여자다. 뮤지컬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의 여자론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가 있다. 여러 남자를 만나며 사는 건 같지만, 라파엘라와 루시는 다르다. 루시는 남성인 지킬·하이드의 시선과 욕망 안에서 묘사됐다. 라파엘라는 여성인 렘피카의 눈으로 그려진 캐릭터다.


두 캐릭터 모두 주인공을 유혹하는 장면과 넘버가 있지만, 느낌은 사뭇 다르다. 루시는 처음엔 자신 뜻으로 지킬을 유혹한 게 아니었지만, 먼저 렘피카를 원한 라파엘라는 주저하는 렘피카를 적극적으로 끌어당긴다. 렘피카 또한 거리의 여자 취급을 받은 과거가 있기에, 라파엘라에게 연민을 느끼며 여성 간의 연대감을 공유하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라파엘라와 루시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지만, 라파엘라는 ‘생존’했기에 새 삶을 꾸려나갔을 것이다.


미래파 화가 마리네티 또한 특별하다. 성격, 감정선, 넘버, 등장 장면들 모두가 독특한 마리네티는 흔히 볼 수 없는 캐릭터다. 입만 열면 여성 비하 발언을 쏟아내면서도, 여성 예술가 렘피카의 작품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도 미치기 때문이다.


마리네티를 연기하는 배우들은(김호영·조형균) 1막 초반, 렘피카가 남편 타데우스를 구하러 가는 수용소장까지 연기한다. 1인 2역은 무대 예술에서 흔한 연출이지만, 수용소장과 마리네티의 1인 2역은 거칠고 의미심장하다. 수용소장은 렘피카를 단박에 추락시키지만, 마리네티는 렘피카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며 그를 수면 위로 밀어 올렸다.


김호영의 마리네티·수용소장은 그의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랐다. 독보적인 캐릭터와 탄탄한 연기력으로 자신을 증명해 온 김호영은 렘피카를 ‘끌어올리’기만 하지 않았다. 평소 보기 힘든 선 굵고 서늘한 연기와 잘못된 신념이란 광기에 사로잡힌 김호영의 마리네티는 강렬했다.

 

 

518738-0.jpg

 

 

뮤지컬 <렘피카>는 쉽지 않은 작품이다. 격변의 시대를 질주한 금속 같은 여자, 타마라 드 렘피카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입체적이다. 작품은 그를 미화하지 않았다. 렘피카는 라파엘라를 사랑했지만, 남편 타데우스 또한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는 죽도록 사랑한 두 명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받았다.


렘피카는 딸 키제트의 엄마로서도 평범하진 않았다. 엄마 대신 ‘쉐리’라 자신을 부르게 한 렘피카는 남편 타데우스를 뮤즈로 아담을, 연인 라파엘라를 뮤즈로 이브를 그리며 ‘아담과 이브’를 완성했다. 하지만 그는 딸 키제트가 아담과 이브 이야기 속 ‘뱀’이었단 사실은 간과하며 파멸로 끌려 들어갔다.


재능과 야심이 넘치고, 수완도 좋았으며, 사랑에도 열정적이었지만 이기적이었던 여성, 양성애자, 예술가 렘피카. 모든 걸 가졌지만, 말년엔 많은 걸 잃고 캔버스 앞에 앉은 그의 눈은 젊은 시절처럼 뜨거움으로 번뜩인다. 노인이 돼도 들끓는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붓을 든 렘피카에게선 여전히 젊은 욕망과 생존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그의 붓질을 보며 또 한 가지를 발견한다. 아름다움을 움켜쥐려 평생을 발버둥 치는 게 예술가의 삶이란 것을.

 

 

 

이진_PRESS.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