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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아름다운 신화 속 숨겨진 시대의 병 - 뮤지컬 '엘리자벳' [공연]

극 스스로가 던지는 질문: "키치!"

by 이유빈 에디터
2026.09.0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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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뮤지컬 <엘리자벳>은 화려하다. 검은 망토를 두른 죽음이 등장할 때마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이 뮤지컬의 대표 넘버 "나는 나만의 것"이 시작되면 다들 숨을 죽인다. 30년 넘게 독일어권 무대를 지켜온 이 작품이 한국에서도 확고한 팬덤을 갖게 된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화려한 무대, 강렬한 멜로디,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존재를 실제 인물로 만들어버린 대담한 상상력 이 모든 게 관객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정말 따져볼 만한 지점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극이 얼마나 화려하고 감동적인가가 아니라, 엘리자벳이 실제로 겪었을 고통, 즉 결혼과 궁정 생활 속에서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극이 얼마나 자세히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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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로 번역된 고통



      물론 이 극이 그녀를 억눌렀던 상황을 아예 안 보여주는 건 아니다. 시어머니 소피 대공비가 손주들의 양육권을 가져가고, 궁정의 엄격한 예법으로 그녀를 옥죄는 장면들은 꽤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다만 정작 엘리자벳이 그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소피와 직접 맞서거나 궁정의 규칙을 바꾸는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신비로운 존재와의 관계로 옮겨가 버린다. 다시 말해 극은 무엇이 그녀를 가뒀는지는 보여주면서도, 정작 그 갇힘에서 풀려나는 순간은 현실 속 해결이 아니라 죽음과의 신비로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초현실적인 일로 그려내고 있다.

       

      즉, 뮤지컬 <엘리자벳>은 억압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죽음이라는 매혹적인 존재와의 은밀한 관계로 그려낸다. 이건 이 극이 택한 하나의 특유한 예술적 방법이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기고,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다뤄지는 것에서 오는 것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 감각에 대해 이 극은 그것을 신화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옮겨서, 관객이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몸으로 먼저 느끼게 만든다.


      다만 이런 방식에는 어쩔 수 없는 댓가가 따른다. 감동은 커지는 대신, 그 억압이 실제로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어떤 구체적인 관계와 제도 속에서 비롯됐는지는 상대적으로 흐려진다. 엘리자벳을 옥죄었던 건 결국 왕가의 예법, 시어머니의 권력, 여성에게 허락된 좁은 범위의 역할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었을 텐데, 극은 이걸 '죽음과의 운명적인 관계'라는 좀 더 크고 신비로운 이야기 안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면 관객은 그녀의 고통에 훨씬 쉽게 이입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만들어낸 구체적인 조건들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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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 스스로가 던지는 질문: "키치!"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키치’라는 미학적 개념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가져와보고자 한다. 실제로 <엘리자벳> 2막은 "키치(kitsch)"라는 노래로 문을 연다. 루케니가 객석에서 등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엘리자벳이 죽은 뒤 그녀의 이미지가 어떻게 온갖 기념품과 엽서를 통해 대중적 신화로 팔려나갔는지를 조롱 섞인 어조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루케니라는 MC 포지션 캐릭터를 설정함으로서, 극은 스스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냉소적인 스탠스로 표현한다.


      즉, 한 여자의 실제 고통이 사후에 얼마나 손쉽게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향수 어린 이미지로 다시 포장되는지를 말이다. 그렇기에 이 넘버는 사실상 극 자신에게도 되돌아오는 질문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 화려한 이야기 자체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그녀의 고통을 다시 한번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키치 개념이 유용해진다. 그는 키치를 무조건 저급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산업화된 시대, 대중문화와 자본주의가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난 키치는 오히려 대중이 세상을 느끼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봤다.


      다만 그는 키치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대신 이미 만들어진 손쉬운 감정을 제공하는 얼굴이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볼거리 속에서 대중은 굳이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곧바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 화려함이 유행이 지나 낡아버리는 순간, 한때 영원할 것 같았던 그 번영과 아름다움이 사실 허상이었다는 걸 스스로 드러내며 대중을 깨우는 얼굴이다. 벤야민은 이 두 얼굴이 하나의 대상 안에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봤다.

       

      <엘리자벳>은 이 두 얼굴을 정확히 동시에 갖고 있는 작품이다. 극은 한편으로는 엘리자벳의 삶을 관능적이고 신비로운 로맨스로 포장해서 관객이 손쉽게 감동하도록 만든다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키치"라는 넘버를 통해, 바로 그 포장 자체가 상업적으로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지를 스스로 폭로한다.

       

      루케니가 엘리자벳 기념품을 팔아치우는 이 장면은, 벤야민이 말한 두 번째 얼굴, 즉 키치가 자신의 허구성을 드러내며 관객을 깨우는 순간을 극이 직접 연기해 보이는 셈이다. 극은 자신이 파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고, 심지어 그걸 관객 앞에서 인정한다. 다만 그렇게 자기 자신을 조롱한 뒤에도, 극은 결국 다시 같은 방식의 아름다운 신화로 돌아가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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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려받은 냉담함,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



      극이 엘리자벳을 다루는 방식에서 흥미로운 지점 하나는, 그녀가 짓눌린 존재라는 걸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녀 스스로 아들 루돌프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거리를 두고 냉담했다는 사실까지 함께 깊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억압받은 사람이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아이에게 비슷한 결핍을 물려주는 순간을, 극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그녀가 왜 그렇게 매정했나"를 그녀의 잘못으로 탓하기보다, 죽음에게 붙들린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루돌프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이 극이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극은 그와 어머니 사이의 오랜 냉담함과 갈등을 상당한 시간을 들여 보여주고, 동시에 그가 헝가리 독립 세력과 손잡고 아버지의 제국에 등을 돌리려 했던 정치적 행보까지 함께 깊이 있게 그린다.


      개인적 상실감과 정치적 좌절이 뒤엉켜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이렇게 겹겹이 보여주는 건, 앞서 살펴본 엘리자벳 자신의 서사와는 다른 결이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낡은 다민족 제국을 밑에서부터 뒤흔들던 시대, 그 불안이 훗날 20세기의 어두운 장면들로까지 이어져갔다는 걸 알고 나면, 루돌프라는 인물과 그의 죽음은 극이 그려낸 것보다도 한층 더 큰 무게를 가진 사건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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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해인가, 체념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자벳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평생의 방황 끝에 찾아온 화해처럼 보이지만, 다르게 보면 그녀가 평생 저항해온 '자유의 상실'이 결국 죽음에게 온전히 마음을 여는 방식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걸 승리로 볼지 체념으로 볼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평생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이, 결국 죽음에게만은 자신을 완전히 내어준다는 결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씁쓸하다. 그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유는, 결국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지 못한 채 한 존재(실제로 죽음을 존재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에게 완전히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걸 조금 다르게 보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극이 설정해놓은 자유의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완전히 성취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나만의 것"이라는 선언은 아름답지만,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애초에 실현 가능한 목표라기보다 하나의 태도, 하나의 저항의 움직임에 가깝다.

       

      그렇다면 극의 결말은 그녀가 실패했다는 증거라기보다, 애초에 완전한 자유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극이 이 애매함을 일부러 열어둔 건지, 아니면 감동적인 마무리를 위해 자연스럽게 봉합한 건지는 여전히 흥미로운 논쟁거리다.

       

       

       

      나가며


       

      결국 <엘리자벳>이 하고 있는 일은, 한 여성이 짊어졌던 구체적인 억압과 한 시대가 함께 앓았던 불안을 신화적인 로맨스의 언어로 옮겨 담는 것이다. 이 번역은 분명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 덕분에 이 작품은 수십 년간 사랑받아왔다. 어떤 고통은 있는 그대로 그려질 때보다 신화의 언어로 옮겨질 때 더 많은 사람에게 와닿기도 한다. "키치"라는 노래가 보여주듯, 극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극은 자기 폭로보다는 몰입을 최종적으로 선택한다.

       

      다만 이 작품을 온전히 즐기려면, 무대 위의 신화만이 아니라 그 신화가 부드럽게 감싸 안은 것들, 즉 한 사람이 실제로 짊어졌을 억압, 그녀가 물려준 냉담함, 시대가 함께 앓던 불안까지 함께 헤아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때 <엘리자벳>은 '슬픈 황후 이야기'를 넘어, 훨씬 더 깊이 있게 다가오는 작품이 된다. 화려한 감옥은 여전히 감옥이지만, 그 화려함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알고 나서 다시 보는 감옥은, 처음 볼 때와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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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2
      곽한별
      이유빈 님, 부끄럽지만 저는 이 뮤지컬을 유빈님의 글 덕분에 처음 알았습니다. "신화와 신비가 함께하는 아름다운 죽음의 시각화" 정말 멋있고 섬뜩하네요. 꼭 보고 싶어요. 단순한 인물의 심리 분석을 넘어 시대적 배경까지 고려해주신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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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0 17:36:34 0
      윱인
      저도 사실 이 뮤지컬에 제일 끌렸던 부분이 죽음을 의인화한 것, 죽음을 갈망한다는 건 극에서 그 존재를 떠올리거나 사랑에 빠지는 것, 또 결국 죽음을 택한다는 건 극속에서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이런 부분이었어요. 요즘 인외 존재들이 유행하는 걸(?) 보면 사람들은 그런 비인간적인 것을 인간화하는 데서 흥미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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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30 23:30:24 1
      최수경
      평소 뮤지컬을 좋아해서 종종 작품을 보러 다니곤 했는데, 저는 무대 위의 화려한 연출과 음악, 배우들의 연기에 감탄하는 데에만 익숙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화려함이 무엇을 보여주는지를 넘어, 오히려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들여다보는 유빈님의 시선이 무척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키치’에 대한 해석도 인상적이에요. 새로운 감상의 시선을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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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1 17:27:31 0
      윱인
      수경 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벤야민이 엘리자벳 뮤지컬과 같은 독일어 문화권의 학자이다보니 키치라는 개념이 이 극과 좀 더 잘 들어맞았던 것 같기도 해요. 이 뮤지컬은 뭐랄까 레이어가 많은 다층적인 작품이라서 그곳을 하나하나 뜯어서 보는 재미가 있는 극인 것 같기도 하고요. 기회가 되시면 한 번 보시면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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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30 23:22:19 0
      소현
      저도 극의 이름만 들어보고, 상세한 내용은 유빈님의 글을 통해 접하게 됐어요.
      글을 읽으면서 특히 인상 깊었던 지점은 주인공 엘리자벳의 결핍이었어요. 저는 인물이 가진 결핍이 그 인물의 개성과 매력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행동이어도, 연출된 극을 바라보는 관객으로서는 그녀의 결핍과 두려움을 통해 인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
      결국 극, 더 나아가 우리가 이야기를 접한다는 건 내가 아닌 타인의 결핍을 이해하고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복잡다단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연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유빈님 덕분에 좋은 작품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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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2 13:17:45 0
      윱인
      맞아요. 우리가 가상의 이야기를 보는 것의 묘미는 이걸 보거나 읽는 관객 혹은 독자는 이 이야기의 갈등이건 오해건 이 인물의 트라우마 건 좀 조망하는 상태에 있는데, 그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시선 속에서 볼 수밖에 없다는 시각의 차등인 것 같아요.

      자유를 갈망했지만 같은 걸 꿈꾸었던 아들에게는 냉담했던 그녀의 모습이 인간이 갖는 초점의 한계를 보여주면서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건 결국 자신이 가지거나 받은 것이 아닐까 싶어 슬프기도 놀랍기도 했어요.

      그런 점에서 가상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통찰과 또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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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30 23:26:54 1
      장미
      본 적은 없지만 설정이나 화려한 비주얼이나 인상적인 넘버를 알고 있었는데, 그런 부수적인 것만 기억하고 엘리자벳이란 인물을 어떻게 그려냈는지에 대한 감상은 이글을 통해서 처음 접했네요. 상업극이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게 하는 장치로 넘버를 쓴다는 게 굉장히 뮤지컬적인 방식이네요. 깊이 있는 좋은 글을 통해 대형 뮤지컬이 어떻게 주제를 소비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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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2 16:41:16 0
      윱인
      맞아요. 뮤지컬이란 결국 해야 할 이야기나 전개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넘버로 쓰고 있고, 그래야 또 관객이 그 극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아요.

      저는 수많은 뮤지컬이 있지만 이 뮤지컬의 작곡가, 작사가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가사의 면에 있어서는 곱씹어보면서 들어볼 만한 상징적인 면모가 있고, 멜로디에 있어서는 핵심 멜로디가 반복 또는 변주되면서 전개되는 걸 들을 때 재밌는 것 같아요. 또 멜로디 자체가 오스트리아 빈을 느끼게도 하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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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30 23:34:23 0
      윤경주
      엘리자벳은 예전에 실황 영화로 본 적이 있는데, 유빈님의 글을 읽고 나니 이번 공연으로 다시 접해보고 싶어지네요! 키치라는 넘버가 재미있고 흥이 나서 좋아했었는데, 벤야민의 개념과 그 해석이 기억에 남네요. 좋은 감상평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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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7 23:40:43 0
      윱인
      맞아요. 키치 곡은 극이 너무 딥해지고 어두워지려고 하면 일종의 완급 조절을 위해 등장하는 곡 같아요. 직관적으로는 이 뮤지컬의 창작에 관여한 주체들은 적어도 이 엘리자벳이라는 자기 나라의 황후를 그저 비판점 없이 칭송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두는 장치로서 그 곡을 부른 루케니라는 인물을 그렇게 배치한 것 같기도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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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30 23:38:11 0
      당근이
      안녕하세요 유빈 에디터님!

      저는 뮤지컬을 정말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던 사람인데요, 유빈 에디터님의 상세하고 생생한 리뷰를 읽으면서 마치 엘리자벳 뮤지컬을 한 편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벳이 택한 완전한 '자유'가 결국 죽음일 수 밖에 없었다는 점, 무엇으로부터도 속하지도, 관계하지도 않는 사람은 없기에 애초부터 자유란 없는 것을 내포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생각을 나눠주신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정말 단적인 예로, 저는 일상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인간관계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아갈 때가 있었는데요.  오히려 그렇게 단절하고 살아가는 동안 또 다른 힘겨움이 있었기에 정말 스스로 자유로웠는지, 애초에 실현 가능한 목표였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결국 어떤 하나를 지독히 추구하는 설정 자체가 캐릭터성을 만들고, 극을 이끌어가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자 기획자이기에  능동적으로 캐릭터 설정에 변주를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런 인사이트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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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28 13:39:36 0
      윱인
      맞아요. 그래서 저는 엘리자벳이 자유를 좀 더 다르게 생각해봤다면 그렇게 이상적인 자유를 추구하다가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것에 비관하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진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기도 했었네요. 물론 그녀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했고 억압이 있었기에 일단 거기로부터 탈출하자! 라는 갈망이 강렬할 수밖에 없었기도 하겠지만요. 그래서 결국 이 뮤지컬이 말하고 싶은 한 문장이 뭘까라고 생각하면 잘 모르겠어요ㅎㅎ 그래서 저는 이 극을 보면서 들었던 여러가지 단상을 이 글로 써보고 싶기도 했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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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9.30 23:42:2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