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엘리자벳>은 화려하다. 검은 망토를 두른 죽음이 등장할 때마다 객석에서는 탄성이 터지고, 이 뮤지컬의 대표 넘버 "나는 나만의 것"이 시작되면 다들 숨을 죽인다. 30년 넘게 독일어권 무대를 지켜온 이 작품이 한국에서도 확고한 팬덤을 갖게 된 건 우연은 아닐 것이다.
화려한 무대, 강렬한 멜로디,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존재를 실제 인물로 만들어버린 대담한 상상력 이 모든 게 관객을 압도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정말 따져볼 만한 지점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극이 얼마나 화려하고 감동적인가가 아니라, 엘리자벳이 실제로 겪었을 고통, 즉 결혼과 궁정 생활 속에서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상황을 극이 얼마나 자세히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다.
신화로 번역된 고통
물론 이 극이 그녀를 억눌렀던 상황을 아예 안 보여주는 건 아니다. 시어머니 소피 대공비가 손주들의 양육권을 가져가고, 궁정의 엄격한 예법으로 그녀를 옥죄는 장면들은 꽤 구체적으로 그려진다. 다만 정작 엘리자벳이 그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소피와 직접 맞서거나 궁정의 규칙을 바꾸는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신비로운 존재와의 관계로 옮겨가 버린다. 다시 말해 극은 무엇이 그녀를 가뒀는지는 보여주면서도, 정작 그 갇힘에서 풀려나는 순간은 현실 속 해결이 아니라 죽음과의 신비로운 관계 안에서 벌어지는 초현실적인 일로 그려내고 있다.
즉, 뮤지컬 <엘리자벳>은 억압을 이야기하면서도 그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죽음이라는 매혹적인 존재와의 은밀한 관계로 그려낸다. 이건 이 극이 택한 하나의 특유한 예술적 방법이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기고,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다뤄지는 것에서 오는 것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 감각에 대해 이 극은 그것을 신화적이고 감각적인 언어로 옮겨서, 관객이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몸으로 먼저 느끼게 만든다.
다만 이런 방식에는 어쩔 수 없는 댓가가 따른다. 감동은 커지는 대신, 그 억압이 실제로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어떤 구체적인 관계와 제도 속에서 비롯됐는지는 상대적으로 흐려진다. 엘리자벳을 옥죄었던 건 결국 왕가의 예법, 시어머니의 권력, 여성에게 허락된 좁은 범위의 역할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것들이었을 텐데, 극은 이걸 '죽음과의 운명적인 관계'라는 좀 더 크고 신비로운 이야기 안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면 관객은 그녀의 고통에 훨씬 쉽게 이입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고통을 만들어낸 구체적인 조건들에 대해서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극 스스로가 던지는 질문: "키치!"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키치’라는 미학적 개념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가져와보고자 한다. 실제로 <엘리자벳> 2막은 "키치(kitsch)"라는 노래로 문을 연다. 루케니가 객석에서 등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엘리자벳이 죽은 뒤 그녀의 이미지가 어떻게 온갖 기념품과 엽서를 통해 대중적 신화로 팔려나갔는지를 조롱 섞인 어조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루케니라는 MC 포지션 캐릭터를 설정함으로서, 극은 스스로가 알고 있는 사실을 냉소적인 스탠스로 표현한다.
즉, 한 여자의 실제 고통이 사후에 얼마나 손쉽게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향수 어린 이미지로 다시 포장되는지를 말이다. 그렇기에 이 넘버는 사실상 극 자신에게도 되돌아오는 질문이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 화려한 이야기 자체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그녀의 고통을 다시 한번 소비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벤야민의 키치 개념이 유용해진다. 그는 키치를 무조건 저급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산업화된 시대, 대중문화와 자본주의가 만나는 지점에서 태어난 키치는 오히려 대중이 세상을 느끼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봤다.
다만 그는 키치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대신 이미 만들어진 손쉬운 감정을 제공하는 얼굴이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볼거리 속에서 대중은 굳이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곧바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 화려함이 유행이 지나 낡아버리는 순간, 한때 영원할 것 같았던 그 번영과 아름다움이 사실 허상이었다는 걸 스스로 드러내며 대중을 깨우는 얼굴이다. 벤야민은 이 두 얼굴이 하나의 대상 안에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봤다.
<엘리자벳>은 이 두 얼굴을 정확히 동시에 갖고 있는 작품이다. 극은 한편으로는 엘리자벳의 삶을 관능적이고 신비로운 로맨스로 포장해서 관객이 손쉽게 감동하도록 만든다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키치"라는 넘버를 통해, 바로 그 포장 자체가 상업적으로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지를 스스로 폭로한다.
루케니가 엘리자벳 기념품을 팔아치우는 이 장면은, 벤야민이 말한 두 번째 얼굴, 즉 키치가 자신의 허구성을 드러내며 관객을 깨우는 순간을 극이 직접 연기해 보이는 셈이다. 극은 자신이 파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고, 심지어 그걸 관객 앞에서 인정한다. 다만 그렇게 자기 자신을 조롱한 뒤에도, 극은 결국 다시 같은 방식의 아름다운 신화로 돌아가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물려받은 냉담함, 그리고 한 사람의 죽음
극이 엘리자벳을 다루는 방식에서 흥미로운 지점 하나는, 그녀가 짓눌린 존재라는 걸 강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녀 스스로 아들 루돌프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거리를 두고 냉담했다는 사실까지 함께 깊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억압받은 사람이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아이에게 비슷한 결핍을 물려주는 순간을, 극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그녀가 왜 그렇게 매정했나"를 그녀의 잘못으로 탓하기보다, 죽음에게 붙들린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루돌프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이 극이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극은 그와 어머니 사이의 오랜 냉담함과 갈등을 상당한 시간을 들여 보여주고, 동시에 그가 헝가리 독립 세력과 손잡고 아버지의 제국에 등을 돌리려 했던 정치적 행보까지 함께 깊이 있게 그린다.
개인적 상실감과 정치적 좌절이 뒤엉켜 한 사람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이렇게 겹겹이 보여주는 건, 앞서 살펴본 엘리자벳 자신의 서사와는 다른 결이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낡은 다민족 제국을 밑에서부터 뒤흔들던 시대, 그 불안이 훗날 20세기의 어두운 장면들로까지 이어져갔다는 걸 알고 나면, 루돌프라는 인물과 그의 죽음은 극이 그려낸 것보다도 한층 더 큰 무게를 가진 사건으로 다가온다.
화해인가, 체념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자벳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평생의 방황 끝에 찾아온 화해처럼 보이지만, 다르게 보면 그녀가 평생 저항해온 '자유의 상실'이 결국 죽음에게 온전히 마음을 여는 방식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걸 승리로 볼지 체념으로 볼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평생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람이, 결국 죽음에게만은 자신을 완전히 내어준다는 결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씁쓸하다. 그녀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자유는, 결국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지 못한 채 한 존재(실제로 죽음을 존재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에게 완전히 귀속되는 방식으로만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걸 조금 다르게 보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극이 설정해놓은 자유의 개념 자체가, 처음부터 완전히 성취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나만의 것"이라는 선언은 아름답지만, 그 무엇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다짐은 애초에 실현 가능한 목표라기보다 하나의 태도, 하나의 저항의 움직임에 가깝다.
그렇다면 극의 결말은 그녀가 실패했다는 증거라기보다, 애초에 완전한 자유란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극이 이 애매함을 일부러 열어둔 건지, 아니면 감동적인 마무리를 위해 자연스럽게 봉합한 건지는 여전히 흥미로운 논쟁거리다.
나가며
결국 <엘리자벳>이 하고 있는 일은, 한 여성이 짊어졌던 구체적인 억압과 한 시대가 함께 앓았던 불안을 신화적인 로맨스의 언어로 옮겨 담는 것이다. 이 번역은 분명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 덕분에 이 작품은 수십 년간 사랑받아왔다. 어떤 고통은 있는 그대로 그려질 때보다 신화의 언어로 옮겨질 때 더 많은 사람에게 와닿기도 한다. "키치"라는 노래가 보여주듯, 극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극은 자기 폭로보다는 몰입을 최종적으로 선택한다.
다만 이 작품을 온전히 즐기려면, 무대 위의 신화만이 아니라 그 신화가 부드럽게 감싸 안은 것들, 즉 한 사람이 실제로 짊어졌을 억압, 그녀가 물려준 냉담함, 시대가 함께 앓던 불안까지 함께 헤아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럴 때 <엘리자벳>은 '슬픈 황후 이야기'를 넘어, 훨씬 더 깊이 있게 다가오는 작품이 된다. 화려한 감옥은 여전히 감옥이지만, 그 화려함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알고 나서 다시 보는 감옥은, 처음 볼 때와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