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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저항마저 소비되는 시대 - 뱅크시 BANKSY : Still Here [전시]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돌아보게 만드는 전시

by 이수진 에디터
2026.08.11 15:38

뱅크시의 작품은 익숙하다. 풍선을 향해 손을 뻗는 소녀, 꽃다발을 던지는 시위자, 무표정한 원숭이. 미술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보았을 이미지들이다.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이토록 대중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부터 흥미롭다. 그래서 뱅크시를 이야기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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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BANKSY : Still Here》를 보고 나니 그의 정체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시를 보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 남았던 것은 다른 질문이었다. 왜 그의 작품은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을까. 왜 몇십 년 전 거리의 벽에 등장했던 풍자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에도 이렇게 쉽게 겹쳐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더 아이러니한 것은, 자본주의와 권력을 비판하던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우리는 티켓을 사고 거대한 백화점 안의 전시장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뱅크시의 작품을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 밖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그의 풍자 안에 들어가 있다는 기분이 든다.

 

 

 

웃음; 생각보다 날카로운 언어

 

전시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섹션 가운데 하나는 ‘유머는 시대를 견디는 방식’이라는 문장으로 소개된 공간이었다. 뱅크시는 분노를 직접적으로 외치기보다 웃음과 풍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의 유머는 마음 편하게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웃기지만 조금 더 바라보면 불편해지고, 결국 내가 무엇을 보고 웃었던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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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웃어라(Laugh Now)>에는 원숭이 한 마리가 샌드위치 보드를 목에 건 채 서 있다.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고 표정도 없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이상할 만큼 섬뜩하다. 보드에는 이런 메시지가 적혀 있다. 지금은 웃어라.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원숭이는 뱅크시의 작품에서 인간 사회를 비추는 존재처럼 보인다. 그 인상이 더욱 선명해진 작품이 <위임된 의회(Devolved Parliament)>였다. 인간 정치인들이 있어야 할 의회에 침팬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심에 선 침팬지가 바나나를 들고 있는 모습까지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침팬지들로 가득한 의회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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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제도가 언제나 합리적으로 작동하는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시민을 위해 움직이는가. 뱅크시는 긴 설명 없이 인간 대신 침팬지를 의회에 앉혀놓는 것만으로 질문을 던진다. 작품을 보고 웃었는데, 결국 웃음의 대상이 침팬지인지 인간인지 알 수 없어진다. 좋은 풍자는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을 향해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웃음이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향하고 있는 것.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함께 놓는 방식

 

<할머니들(Grannies)>도 기억에 오래 남았다. 두 명의 노년 여성이 평온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얼핏 보면 너무나 일상적이고 전통적인 풍경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들고 있는 옷과 천에는 전혀 다른 세계의 문장들이 등장한다. ‘평생 불량배’, ‘펑크는 죽지 않았다’와 같은 반항적이고 도발적인 문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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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그 대비였다. 우리가 흔히 할머니라는 존재에서 떠올리는 것은 전통, 안정, 보수성 같은 이미지다. 반면 펑크는 저항과 반항,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를 상징한다. 뱅크시는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이미지를 한 화면 안에 자연스럽게 가져다 놓는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사람과 세대를 얼마나 쉽게 하나의 이미지로 규정하고 있는지도 생각하게 됐다. 젊음은 진보적이고 노년은 보수적이라는 구분, 어떤 세대는 변화의 주체이고 어떤 세대는 그것을 방해한다는 식의 구분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반항은 젊은 사람만의 전유물도 아니며, 나이를 먹는다고 한 사람이 품었던 생각과 태도가 모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뱅크시의 작품은 이런 고정관념을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들에게 뜨개질 바늘을 쥐여주고 그들이 만드는 천 위에 펑크의 언어를 새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익숙한 이미지에 작은 균열 하나를 내는 것. 어쩌면 풍자가 가진 힘은 바로 그 작은 어긋남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저항을 사고 싶어 줄을 서는 사람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머리를 ‘땡’ 하고 맞은 것 같은 느낌을 준 작품은 <페스티벌(Festival, Destroy Capitalism)>이었다. 작품에는 히피들이 줄을 서 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Destroy Capitalism’, 즉 자본주의를 파괴하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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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재미있는 장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순간 웃음보다 씁쓸함이 먼저 남았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문장이 하나의 상품이 되고, 자본주의를 거부하겠다는 사람들이 그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선다. 저항의 언어조차 가격표가 붙는 순간 소비의 대상이 된다.

 

이 작품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문화가 떠올랐다. 한때 주류 사회에 저항하던 펑크와 힙합, 그래피티와 스트리트 문화는 이제 패션과 광고, 명품 브랜드가 가장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반항적인 태도조차 하나의 스타일이 되고, ‘남들과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또 다른 상품을 구매한다.

 

그렇다면 체제에 대한 저항은 어디까지 체제 밖에 존재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가 티셔츠에 인쇄되어 판매되는 순간, 그것은 비판인 동시에 상품이 된다. 저항의 상징이 소비 가능한 이미지가 되는 순간 체제는 그것을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흡수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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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유독 날카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작품 속 사람들을 쉽게 비웃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가 좋아하는 취향과 가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소비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결국 작품 속 줄을 서 있는 사람들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 뱅크시의 풍자는 그렇게 다시 관객에게 돌아온다.

 

 

 

저항은 어떻게 가장 비싼 브랜드가 되었을까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뱅크시 자신에게도 돌아간다. 자본주의와 미술시장을 끊임없이 비판해온 그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018년 소더비 경매에서 <풍선과 소녀(Girl with Balloon)>가 낙찰된 직후 액자 속에서 파쇄된 사건은 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은 파쇄되면서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라는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술시장의 권위와 예술의 상품화를 조롱하기 위한 행위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건은 작품의 시장가치를 더욱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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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뱅크시다운 역설이 있을까 싶다. 시장을 조롱했는데 시장은 그 조롱마저 가치로 환산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행위조차 다시 자본주의 안에서 거래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거리의 벽에 몰래 그림을 그리던 익명의 그래피티 작가는 이제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다. 그의 새로운 작품이 발견되면 언론이 움직이고, 작품이 그려진 벽은 관광지가 되며, 한때 지워져야 할 낙서였던 그림은 보호막을 씌워 보존해야 하는 자산이 된다. 뱅크시가 비판했던 시스템이 이제 뱅크시라는 이름을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뱅크시가 그 모순에서 도망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이 상품이 되고 자신의 저항이 브랜드가 되는 상황까지 다시 작품의 일부로 만들어버린다. 체제 밖에서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 역시 그 체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채 그 안에서 계속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뱅크시의 작업은 단순한 반자본주의 선언보다 훨씬 복잡하게 느껴졌다.

 

 

 

결국 남는 것은 하나의 생각이다

 

전시를 보면서 유독 오래 기억에 남은 뱅크시의 말이 있었다.

 

 

“단 하나의 독창적인 생각은 의미 없는 명언 천 개보다 가치 있다.”

 

 

전시를 모두 보고 난 뒤 이 문장이 뱅크시라는 작가를 꽤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매일 수없이 많은 말과 주장, 메시지를 접한다. 사회를 비판하는 말도 넘쳐나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선언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잠깐 읽히고 금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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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뱅크시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이미지로 만들어 사람들의 기억에 남긴다. 정치인을 비판하는 긴 글 대신 침팬지를 의회에 앉히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하는 대신 ‘자본주의를 파괴하라’는 티셔츠를 사려고 줄을 선 사람들을 그린다. 설명보다 먼저 이미지가 들어오고, 웃음이 먼저 터진 뒤 질문이 남는다.

 

어쩌면 독창성이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명하는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너무 익숙해서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 것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여주는 것.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낯설게 만드는 것. 뱅크시가 가진 힘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같다.

 

*

 

《BANKSY : Still Here》라는 제목처럼 뱅크시는 여전히 여기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던졌던 질문들이 남아 있다. 전쟁은 왜 계속되는가. 권력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왜 소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가. 그리고 저항조차 상품이 되어버리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이 질문들이 전혀 새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뱅크시가 오랫동안 반복해서 다뤄온 전쟁과 권력, 빈곤, 소비사회의 문제들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씁쓸하다. 작품이 시대를 초월했다기보다, 작품이 비판했던 현실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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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밖으로 나오면서 결국 뱅크시가 누구인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 앞에서 웃고 있던 내가 조금 더 궁금해졌다. 나는 왜 웃었고, 어느 순간부터 왜 웃을 수 없었을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작품을 보고 감탄한 뒤 전시 굿즈를 구경하는 나는 작품 속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까.

 

아마 뱅크시의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벽 위에 하나의 장면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다음 생각하는 일은 그것을 본 사람의 몫이다. 가면 뒤에 누가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 가면 덕분에 우리는 작가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가리키고 있는 세계를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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