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베르겐 쿤스트홀에서 열린 《From This Darkness I Shall Grow》는 잠비아 리빙스턴 출생으로 현재 오슬로와 리빙스턴을 오가며 활동하는 잠비아계 노르웨이인 작가 아나와나 할로바의 개인전이다. 노르웨이 현대미술의 주요 페스티벌 전시 중 하나로, 매년 한 명의 작가에게 이 미술관 전관을 내준다.

Anawana Haloba, 《From This Darkness I Shall Grow》 전시 전경, 2026, Bergen Kunsthall, 직접 촬영
Bergen Kunsthall의 공간적 특성상 메인 전시관은 크게 전시 입구와 연결된 중앙 전시관, 그 양옆으로 연결된 좌, 우 전시관으로 나뉜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음성과 전통적 오브제를 결합한 대형 설치 작품이었다. 세 개의 납작한 목재판에 박힌 뿔 모양 구조물 안에는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자연의 물소리를 연상시키는 소리 등이 다층적으로 쌓여가며 전시관 전반에 울려 퍼졌다. 다소 기이한 형태의 대형 오브제는 마치 여러 생명체가 하나로 엉켜있는, 이전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생명체 같았다. 이것이 내는 소리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벽 사이사이를 침투한다. 이러한 음성적 연출은 각각의 전시관을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남기지 않은 채, '미해결의 공간'으로 남기는 새로운 미학을 보여준다. 그녀는 진정한 '협상'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협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이, 뿔 속에서 기어 나온 소리들이 현실을 비웃듯 벽을 타고 넘어간다.


Anawana Haloba, 《From This Darkness I Shall Grow》 전시 전경, 2026, Bergen Kunsthall, 직접 촬영
우측 전시관의 거대한 원형 설치물 내부의 오목한 공간에는 세 개의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었다. 각각의 스피커에서는 다양한 음성 __목소리, 노래,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소리 등__ 이 흘러나와 함께 합창하며, 여러 목소리가 겹쳐 울리는 '음성의 집합체'를 완성시킨다. 설치물 바깥쪽 볼록한 면에는 내부의 스피커와 벽을 사이로 연결된 칼림바가 설치되어 있다. 이 악기는 '스스로 연주되는(plays by itself)' 기계적 장치로서, 관객의 신체적 개입을 허용하지 않은 채 차가운 금속성 소리를 허공에 흩뿌린다. 내부의 스피커가 외부와 단절된 채 자족적으로 공명한다면, 칼림바는 관람객의 손길조차 거부하며 그들만의 소리를 쏟아낸다. 관객은 악기를 연주하며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소리 내는 기계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목격하게 된다. 이는 타자의 고통을 감상하러 온 관객에게 악기를 쥐어주는 대신, 연주조차 허락하지 않는 거부의 제스처로서 관람객을 큰 혼란에 빠뜨린다.


Anawana Haloba, 《From This Darkness I Shall Grow》 전시 전경, 2026, Bergen Kunsthall, 직접 촬영
이러한 할로바의 전략은 좌측 전시관에서도 이어진다. 설치 벽면에는 갈라진 땅의 영상과 통가 사람들의 움직임이 반투명한 레이어로 겹쳐지는 미디어 아트가 상영되고, 전시관의 끝에는 사전 공모를 통해 선발된 50명의 자원자가 각자의 집에서 길러온 식물들의 집합이 마련되어 있다. 마른 땅을 밟는 춤이 고통의 기억에 대한 저항이자 애도라면, 이미 재배되어 전시된 식물들은 관객에게 묻는다. 제도가 수집하고 재배열한 이 생명의 이야기 앞에 관객은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이 식물 프로젝트는 현장에서의 즉흥적 참여라는 환상을 지우고, 타자의 삶을 제도 안으로 수입해 전시하는 방식을 통해 고통을 소비하는 관람객들의 방관자적 태도를 강제로 흔들어 놓는다.

Anawana Haloba, 《From This Darkness I Shall Grow》 전시 전경, 2026, Bergen Kunsthall, 직접 촬영
다시 전시관을 가로질러, 우측 전시관의 한쪽 벽에는 8점의 작은 인쇄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각각은 '인간 재해'로 인해 위기에 휩싸인 지역의 사진과, 그 위에 여러 형상을 색연필로 덧그린 이미지이다. 그중 한 점에는 폐허의 사진 위에 흩어진 분홍 꽃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You might not know this, but sometimes sunflowers are the colour of charcoal. But if you closely focus, you will see them glow." "해바라기는 때로 차콜색을 띤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빛나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노란색, 즉 빛과 생명력의 비유로 사용되는 해바라기가 '차콜' __숯의 색__ 과 같아 보인다는 표현은, '폐허 사진들 위에 흩어진 분홍 꽃'들의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 동시에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난다."라는 두 번째 문장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들여다보는' 태도를 요구한다.
이 부분에서, 전시 제목을 다시 읽어볼 수 있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빛날 것이다 __노란색과 차콜, 폐허와 분홍 꽃, 그리고 어둠과 빛__ 이것이 전시가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어둠과 빛은 공존한다. 멀리서 훑어보면 그저 잔해와 검은 화면일 뿐이지만, 가까이서 집중하고 들여다본다면 그 안의 빛, 즉 생존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들여다봄은 단순히 시각적인 집중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가 고통을 아름답게 다듬어 내놓은 '전시의 알리바이'를 뚫어 보라는 명령이다. 관객의 신체적 개입을 거부하며 기계적으로 금속성 소음을 쏟아내는 칼림바, 그리고 제도의 철저한 관리 아래 수집되고 재배열된 식물 프로젝트는 관객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고통 앞에서 주체적인 협상자인가, 아니면 그저 구경꾼인가?' 전시는 관객에게 '들여다봄'이라는 이름의 책임을 묻고 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빛나는 생명이, 사실은 제도가 수집하여 전시 가능한 형태로 박제한 타자의 파편임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세 공간은 분리되었다는 인상보다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는 인상을 준다. 실체 없는 소리가 벽을 통과하고 넘어 전시관 전체로 퍼져 나감과 동시에, 관람객들은 전시관 어디에서도 '고통의 타자'로서 회피할 자리를 찾지 못한다. 중앙에서 흘러나오는 그들의 음성을 피해 좌로 도망치고, 우로 달려나가도 공간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전시는 더 이상 단순한 관조를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소리 내는 기계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목격하고, 제도가 수집한 식물들의 이야기 앞에 서게 함으로써, 관객이 이미 타자의 고통에 연루되어 있음을 뼈아프게 직시하도록 유도한다.
그럼에도 할로바의 전시를 보는 동안 좀처럼 가시지 않는 긴장감이 있었다. 전통 악기, 공예, 의례, 구전 전통 등 할로바가 쓰는 재료들은 표면적으로 '원시적'이라 분류되기 쉬운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관객이 이 낯선 이국적 감각을 선사하는 재료들에 매료되어 진짜 탈식민적 통찰에 도달하지 못하고, '원시성의 신비'를 소비하는 데 그칠 위험은 분명히 존재한다. '통가'라는 구체적 대상이 예술의 재료로 다뤄져 미술관이라는 제도 안에 놓이는 순간, 그것은 다시 소비될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을 지레짐작하여 진단하는 것과, 해당 전시가 실제로 그 위험에 빠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노르웨이 미술 전문지 Kunstkritikk의 평론가 Jakob Myklebust Huus는 오히려 반대되는 인상을 전한다. 그에 따르면 이 전시는 각 지역의 탈식민적 상황이 지닌 구체적 특수성을 거의 명시하지 않으며, 작가가 내세우는 것은 그 특수성이 아니라 거기서 종합적으로 발생하는 연대와, 여러 목소리가 함께 울리는 성질 그 자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할로바는 대상을 특정하여 '통가다움'을 또렷이 새겨 넣기보다, 그것을 다른 지역들의 고통과 뒤섞어 희석해 버린다. 이 반론은 양가적 해석의 여지를 이끌어내며, 이 글의 논지를 한 단계 더 정교하게 만든다. 할로바처럼 특정 문화의 구체성을 지우는 전략은 손쉬운 오리엔탈리즘적 인식을 차단하는 효과를 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했는가'라는 역사적 책임의 소재를 흐려 고통을 더 추상적이고 더 소비하기 쉬운 '아주 보편적인 세계의 고통'의 형태로 만들 위험도 공존하게 된다. 할로바의 전시는 원시성의 신비를 내놓는 대신, '고통의 익명화'라는 또 다른 형태의 손쉬운 소비 가능성을 제공하는 셈이다.
게다가 작품이 전시된 다음 어떻게 다뤄지고 받아들여지는지는 작가의 의도 밖에 존재한다. 베르겐은 예로부터 거대한 항구도시이자, 대항해시대 이래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물자가 거쳐 간 유럽의 관문이었다. 이 역사적 위치성을 고려하면, 탈식민이라는 주제가 정작 서구 관객에게 비교적 죄책감 없이 타자의 고통을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안전한 거리'를 제공하는 장치로 기능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현대미술 기관을 지향하는 베르겐 쿤스트홀 입장에서, 탈식민주의는 기관 스스로의 계몽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소재로도 쓰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할로바의 목소리는 미술관이라는 필터를 통해 여과되며, 서구적 시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세련된 오리엔탈리즘'으로 다시 다듬어질 위험을 품게 된다. 여기서 탈식민주의 예술이 마주하는 근본적인 딜레마는,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이제 더 이상 타자의 목소리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환대'한다는 점에 있다. 동시대 비서구 작가의 저항 서사는 정갈한 화이트 큐브 안에서 세련되게 재현되며, 일부 서구 관람객에게는 역사적 죄책감을 씻어주는 '도덕적 면죄부'로, 기관에게는 시의성 있는 급진적 다양성을 획득했다는 '포트폴리오'로 날개를 달게 된다. 결국 할로바가 무대 위에 올린 고통의 역사와 전통 오브제들은, 제도적 필터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 고유의 정치적 힘을 잃은 채 '전시 가능한 형태의 타자성'으로 포획될 위험을 상시적으로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할로바의 작업을 그저 제도에 포획된 결과물로 단정하려는 뜻은 아니다. 할로바가 배치한 '물질들의 끈질긴 생동력'은 세계가 망각하기 쉬운 이 구조에 미세하지만 파괴적인 균열을 낸다. 관람객이 가시화된 타자의 고통을 그저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소리 내는 기계적 칼림바와 이미 제도에 의해 수집되고 관리된 식물들이 불러내는 '공모의 의례' 앞에 서게 되는 경험은, 기존의 미학적 관조를 '함께 얽혀드는' 감각으로 재탄생시킨다. 언어와 담론은 미술관의 세련된 문법 안으로 쉬이 흡수되지만, 그녀가 전시장 전체에 풀어놓고 심어놓은 날것의 소리들과 제도의 관리 아래 놓인 생명체들이 뿜어내는 감각은 다르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 뚜렷하게 기억되지 못해도 그 잔상만으로도 유효한 형태로 무의식의 심연까지 도달할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제도가 구축한 안전한 거리감을 무너뜨리고, 관람객 각 개인이 이 잔혹한 구조에 이미 연루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미학적 저항이다.
결론적으로, 할로바의 작업이 이 '환대의 함정'을 완전히 피해 갔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전시장 내부를 유영하는 저항들이 미술관의 문턱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저항은 적어도 '전시 가능한 형태의 타자성'에 안주하길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전복적인 의의를 지닌다고 감히 평하고 싶다. 제도는 그 저항마저 '무해한 미학'으로 흡수해낼 수도 있고, 할로바의 작업이 낸 미세한 상처는 그 틀을 찢고 나와 판을 뒤엎을 수도 있다. 이 둘은 양립 가능한 결말이 아니라, 탈식민주의 예술이 제도 안에서 그 목소리를 토해내는 한 피할 수 없는 근본적 딜레마일 것이다. 할로바의 작업이 그 본연의 목적성을 완전히 구현했다고 말하기는 이르고, 완연히 그러지 못했다고 단정하기도 이르다. 다만 그 작업은 수동적인 관조가 아닌 '공모의 의례'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한 번도 스스로 걸음하고자 하지 않았던 길로 관객을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