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야망은 일종의 굶주림이 되어 무언가를 잡아먹게 하기도 한다

앙리 루소, 『호랑이에게 습격당하는 정찰병들』(Éclaireurs attaqués par un tigre), 1904, 오랑주리 미술관, 직접 촬영
André Glucksmann의
‘예술계도 이 식탁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를 고매하다 칭하는 문명인들이 어떻게 타자를 ‘예술’로서 조리하여 ‘전시’라는 식탁 위에 올리고, 그것을 먹어치우는지, 즉 ‘소비’하는지 고민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예술가 개인, 그리고 미술관 및 박물관 등의 규모의 기관들도, 주걱을 잡고 거대한 팟을 휘저으며 어떤 덩어리와 가루를 함께 고아낼지 고민하는 입장은 다를 바가 없다.
글뤼크스만이 저서에서 ‘전체주의 권력이 인민을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한 재료로 어떻게 가공하는지’를 고발했듯, 현대의 미술관 또한 거대 담론의 이름으로 타자의 문화를 박제하고 편집하는 은밀하고도 불편한 행태들을 보여왔다. 동시대 비평의 과업이 누군가의 주관적 평가 아래 선발된 ’착한 요리사‘와, 축출된 ‘나쁜 요리사’를 깨벗겨놓는 것이라면, 앞으로 예술적 사유를 내재한 비평적 글들이 가야 할 지향점을 통일하기란 여간 쉽지 않을 것이다.
요리사들이 포식자들의 미각에 걸맞게 ‘요리’를 하면, 식인종들이 ‘포식’을 하는 것은 이제 시대를 초월한 불가역적인 ‘여가 산업’의 일부 양상이다. 이 산업에 기여하고 관여한 __이 글을 쓰는 본인 포함__ ‘모두’가 이 식탁의 포식자라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겠지만, 이는 모두가 경유해야만 하는 정답 없는 담론이다.
상대적으로 생리적 굶주림이 희박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문명인의 허기’라는 증상에 노출되기 쉽다. 원시 수렵·채집의 시간과 차별화되는 점은, 오직 ‘굶주림’이라는 원초적 감각이 ‘배에서 머리’로 전이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예술적 표현과 사유에서 시작하는 ‘예술적 갈증’의 충족을 위해, ‘타자 포식’을 기꺼이 선택하는 지적 야만인들이 이 시대에 번잡하게 난무해 있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았는가. 이 포식적 행위는 __극도로 기민하게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공고히 하려는 시대상에 걸맞게__ 조금 ‘점잖아졌다’는 기묘한 간극만을 남긴다. 이러한 ‘점잖은 포식’이 동시대 전시예술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따라가 보며, 전시를 면밀히 살펴볼 것이다.
02. 오랑주리: 루소, 야망의 재료로 완성시킨 명작

앙리 루소, 『뱀을 부리는 여인』 (La Charmeuse de serpents), 1907, 오랑주리 미술관, 직접 촬영
2026년 5월, 오랑주리 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 『Henri Rousseau: L’ambition de la peinture』에서 처음 두 눈으로 그의 회화를 마주하였다.
전시의 흐름은 여타 다른 회고전들과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전시는 루소의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시간순으로 배치되어 있어, 관람객들이 루소의 삶을 따라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그의 삶 전반을 유영하는 회화들은 왜 대중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고 매료되었는지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선과 패턴의 사용, 강렬하고 명확한 색채, 어색하지만 흡입력 있는 자연 묘사 등은 보는 이들에게 파격적인 인상을 주며 작품의 흡인력을 증명해낸다.
한편, 이 전시가 다른 회고전들과 갈라서는 지점은 제목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앙리 루소: 회화의 야망>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회고를 넘어, 루소가 당대 미술계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화풍·주제·전략 등의 요소들을 계산하였는지 주목하겠다는 선언이다. 보편적인 회고전들이 예술가들의 숭고한 열정과 고뇌를 그리는 한편, ‘야망’이라는 __숭고함의 사회적 기준에서 다소 엇나간__ ‘고상하지 못한 동력’을 주제로 선보이려 한 것이, 얼마나 생경한 인상을 줄지 기대되는 바였다.
“I need to be launched by someone so that I can devote myself totally to my Art and to bringing out my ideas. I shall finally have attained my goal.” “누군가가 나를 끌어주어서 내가 예술에 온전히 헌신하고 나의 아이디어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침내 나의 목표를 이룰 것이다.”
”You are quite mistaken not to like my paintings; one day they will be worth more than a hundred thousand francs!” "내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신의 큰 실수야. 언젠가 이 그림들은 10만 프랑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될 거야!"
- 『Henri Rousseau: L’ambition de la peinture』 전시 안내글 참조
전시 안내글에서 언급한 생전 루소의 발언들은 성공 궤도를 향한 그의 벌건 욕망을 처절히 드러낸다. 그가 고안한 ‘원시적’ 화풍은 당대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한 ‘기형적인 미(美)’를 선보였고, 실제로 당시 많은 질타와 힐난을 받았다. 이에 그의 그림을 응시하는 많은 이들이 예측하는 바는 이러할 것이다. 현재 ‘원시주의’라 명명된 색다른 예술적 시도를 통해, 제도적 시선과 시스템에 대항하고, 예술적 시류에 편승하지 않으려 한 비범한 ‘일탈자’라고 말이다.
“Rousseau sought institutional recognition throughout his career. He looked towards the official painters, dreamed of the Salon, and boasted of the medals he received by mistake, likely intended for a namesake.” “경력 내내 루소는 제도적 인정을 추구했다. 그는 공식 화가들을 동경하며 살롱에서 메달을 받기를 꿈꿨고, 동명이인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메달을 실수로 받았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 『Henri Rousseau: L’ambition de la peinture』 전시 안내글 참조
그러나, 이 전시에서 묘사된 루소는 다수의 예상, 그 반대편으로 달려나간다. 그의 야망은 단순한 예술적 자아의 표출에 그치지 않고, 자아 밖에 위치한 타자들의 세상으로 가지를 뻗친다. 예술 사회와 살롱의 인정, 대중의 환호, 높은 경매가 산정 등, 루소의 ‘제도적 인정’에 대한 목마름은 그의 예술 세계가 구축되는 데 상당 부분 작용하였다.
이 같은 독법은 큐레이터 자신의 말과도 공명한다. Musée de l’Orangerie의 디렉터 Claire Bernardi는 언제나 예술로 생계를 꾸리던 루소가 “파리 예술계에서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만들기 위해 장르와 기법을 다양화했다”고 언급하며, 루소의 세속적 번영을 향한 움직임에 대해 증언한다. ¹
여기서 루소의 ‘나이브(Naive)함’이 작동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그는 당시 서구가 미개함으로 낙인찍은 ‘비서구적’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역이용하여 ‘이국적 정글’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셀링 포인트로서 삼았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타자화' __내집단과 다른 집단을 이질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과정__ 의 틀에서 보면, 루소는 그 낙인의 피해자가 아니라 낙인 자체를 재료로 써서 자기 브랜드를 만든 영리하고도, 영악한 ‘마케터’였다. 그의 정글 회화는 결국 서구 문명의 식탁 위에 타자를 올려놓고, 그것을 잘근잘근 먹어치우는 행위였다.
이번 오랑주리의 전시는 의도치 않게, 그동안은 ‘발굴되지 못한 불운의 인재‘, ‘새 예술 사조의 문을 연 혁명가’ 등의, 명성의 광폭에 눈부시게 가려진, 루소의 ‘포식자‘적 면모를 수면 위로 드러낸다. 타문화의 타자를 서구 문명의 식인 행위의 재료로 활용한 루소 역시 굶주린 자들을 위한, 혹은 본인조차 굶주린 요리사였던 것이 아닐까.
이는, 과거 수많은 열등함과 우등함을 정의해 오고, 내집단의 이익을 취하는 수단으로 남용한 ‘식민주의적 사고’와도 중첩된다. 그들은 이미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고 믿어온 내집단의 이론과 이데올로기로 세계를 해석한 것이며, 무엇보다도 집단적이고 내부적인, 주관적인 사고의 종착점에 불과하다. 한편, 강자가 약자를 좀먹는 권력 구조로 재생산된 ‘예술적 포식 행위’는 현대 예술에서도 완결되지 못한 논제로 남아 있다. 식민주의가 제도적으로 종적을 감춘 가운데 근현대 사회부터 일어난 ‘신(新)식민주의의 비극’은, 양가적인 동시대 예술 담론과 마주한다. 사회적 약자를 예술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이 __우리가 망각하지 말아야 할 사회적 난제들을 조명하는 것에 있어 유효하다는__ 시의성을 가짐과 동시에, 그저 현대 예술의 흥행 소재로 남발될 수 있다는 종결되지 못한 담론이다.
¹ Bernardi, C. (2026, March 26). Customs check: The dream-like world of Henri Rousseau explored at the Orangerie. Euronews.
03. 남겨진 힐문: 우리는 모두 포식자의 식탁에 앉아 있다.

앙리 루소, 『잠자는 집시 여인』 (La Bohémienne endormie), 1897, 오랑주리 미술관, 직접 촬영
위 전시를 관람한 모두가,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식탁 위에 앉아 고민의 시간을 태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써 내려가는 나 역시 이 식탁의 포식자 중 하나일 것이라 확언하고 싶다. 전시를 감상하고 누가 '착한 요리사'이고, 누가 '나쁜 요리사'인지를 가리는 동안, 나 또한 루소의 작품과 전시를 재료로 삼아 한 편의 비평이라는 요리를 만들어냈다. 야망이 굶주림의 한 형태라면, 비평 역시 그 굶주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그 굶주림을 제 뇌로 자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떠한 언어와 몸짓으로 이러한 ‘포식자’의 위치를 탈피해 나갈 것인지, 혹은 그 위치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비평의 정당성을 다시 세울 것인지. 이것은 지겹도록 장황하고 위태로운 여정이 될 것이다. 루소가 되어 근사한 식탁을 차릴 것인가, 아니면 그 식탁의 위장을 뚫고 나올 섬유질이 될 것인가. 이것이 차후 예술계가 고심해 나갈, 그리고 고심해 나가야 할 비평적 화두가 될 것을 조심스레 예시하며 이 글을 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