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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1.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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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작가의 「뼈의 기록」은 자이언트북스의 앤솔러지 시리즈, ‘자이언트 픽’인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를 통해 발표된 작품이다. 이후 작가의 소설집인 『모우어』에 수록되어 더욱 많은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접한 것도 소설이 먼저였다. 타 소설집에서 「서프비트」를 읽었고 천선란 작가가 전하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더욱 성장하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따뜻함과 감동뿐만 아니라 희망을 주기도 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자연스레 작가에 관한 관심도 높아졌고 「서프비트」가 수록된 작가의 소설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것이 바로 『모우어』였고 수록된 이야기 중 하나가 「뼈의 기록」이었다. 정제된 말들로 엮인 문장, 그러한 문장들로 가득한 다정한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온도는 따뜻하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뼈의 기록」은 다정해 마지않는다는 것이다.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가 ‘마음’을 깨달아가며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과정. 짧은 이야기를 읽고 든 생각이었다. 그 속에 애도의 마음과 상실의 과정 등이 담겨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이해하고 인간을 대하는 안드로이드라는 내용과 상태 변화가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것이 좋았다. 그 이유를 천천히 서술해 보고자 한다.


안드로이드인 점을 차치하고도 ‘로비스’라는 인물 자체가 다정하고 따뜻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다. 로비스는 모미와 딱 1년을 대화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영안실을 벗어나기를 택한다. 로비스는 가까워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필연성에 맞선다.


로비스는 ‘염’을 위해 제작되어 존재하는 안드로이드다. 그는 ‘오로지 영안실 안에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개체’다. 영안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른 목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탄생하여 그런 운명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운명이 실존할까? 인간의 생애에 운명이라는 말은 낭만적인 상황에 붙일 이름일 수 있지만, 그것은 때로 가능성의 제한, 합리화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운명은 충분히 회의적일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운명을 믿지 않는다. 설령 실재한다 해도 인간은 스스로 그 길을, 결말을 구부릴 힘을 가진 존재라고 믿어왔다. 「뼈의 기록」은 이러한 믿음과 신념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준다. 로비스는 영안실을 벗어나지 않는 운명을 지닌 존재다. 그가 필연적으로 이행하고 살아갈 삶은 ‘장의사’로서의 일뿐이다. 하지만 그는 모미를 위해 그곳을 벗어나 첼에게 부탁까지 한다.


 

“거부할 수가 없어서. 몸은, 거부할 수가 없으니까. 마음이 시키면.”

 

천선란, 「뼈의 기록」, 『모우어』, p.142

 

 

로비스는 마음을 배웠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꺾고 바람을 대신 이뤄주며 더 넓은 세상을 엿보았다. ‘삶’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마음이 본인의 세상을, 가능성을 넓히기도 하는 과정이다.


단조로운 배경일 수 있다. 후반부에 모미를 보낼 때를 제외하면 등장하는 장소라고는 영안실이 전부다. 그렇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단조롭지 않다.


 

“레나님의 뼈는 누구와도 같지 않아 고유합니다.”

 

천선란, 「뼈의 기록」, 『모우어』, p.119

 

 

모든 죽음은 이런 식으로 가능성의 상실로, 기회의 소멸로 가는 것일까.

 

천선란, 「뼈의 기록」, 『모우어』, p.126

 

 

죽음을 통해 고인을 들여보고 그들의 삶을,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이생에 남아 있는 자들의 삶을 살펴보게 된다. 죽음은 그런 것이다. 지나온 모든 시간을 남은 자들이 최대한 헤아려 주는 것. 그를 잃었다는 슬픔과 고통은 모두 남은 자들의 것이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며 편안하게 보내주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부정적인 개념보다는 잘 정리하고 마무리할 기회이지 않을까. 로비스는 그것을 돕는 존재였기에 모미의 마무리를 최대한 편안하게 챙겨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스테인리스 베드의 차가움이 느껴지면서도 일몰의 빛처럼 따뜻함을 지닌 이야기다. 복잡한 무채색의 회화를 본 듯 화려하진 않지만 단조롭지도 않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삶과 죽음에 관해 편안하고 다정하게 고뇌할 기회다.

 

 


2. 소설에서 연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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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공연으로 제작되는 사례를 많이 봐 왔기에 그러한 시도 자체가 어색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읽은 소설이 무대로 옮겨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걱정이 앞선다. 독자마다 상상하는 것이 다를진대 어떻게 연출할 것이며, SF라는 장르 특성상 구현이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영상이 아닌 ‘연극’이라는 장르로 재탄생시킬지, 어떻게 무대 위를 꾸며놓을지 궁금했다.


관람 이후에 든 생각은 ‘소설은 소설, 연극은 연극’이라는 점이었다. 독자가 최대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소설의 특장점이라면 연극도 연출로써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할 기회가 많다는 특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연극 <뼈의 기록>은 2인극이다. 그 말인즉슨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닌 이상 배우가 직접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신, 고인은 그 누구도 연기하지 않는다. 스테인리스 베드만 등장할 뿐이다. 그들은 염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름으로 대체된다. 스테인리스 베드 위와 영안실 바닥에 빛으로 이름을 새겨넣고 염이 끝나면 모래처럼 흐트러져 사라질 뿐이었다.


따라서 책처럼 상상의 여지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소설은 문장을 통해서, 연극은 무대 위 모든 것을 통해서 전달받고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 모든 문장을 상상해 보며 이야기를 따라갔다면, 연극은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것들을 구현해 주며 이야기의 존재감, 현실성을 부여해 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옮겨 놓은 것이 아니다. 고인의 외관이나 부패 정도, 로비스가 말하던 유충의 특징 등 여러 가지를 소설처럼 상상에 맡길 수 있다. 이처럼 연극은 소설과 비슷한 듯 다르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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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예술의전당 (@I_Love_SAC)

 

 

그렇지만 연극은 소설의 내용을 구현하는 것에서 그칠 것으로 생각한 것은 오만이었다. 문장을 시각화한 결과물은 새로운 느낌을 전했다. 그것의 일례로 로비스와 모미의 대화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시각 언어로 대화하는 것은 자세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자주 경험한 일이 아니었기에 그것을 상상해 보기란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조명을 통해 문장 자체를 보여줌과 동시에 배우들은 수화를 비롯한 시각 언어를 보여준다. 이에 관객은 로비스와 모미의 대화 상황을 볼 수가 있었다. 어렴풋이 상상하는 것에 그쳤던 것이 눈앞에 구현되었을 때의 감각은 새로운 경험이 되었고,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소설을 읽으며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곳까지 상상력이 닿았다. 연극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지닌 장르임에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개인의 제한된 상상력을 확장하는 듯했다. 로비스와 모미가 나비에 관해 대화할 때 파도와 나비를 조명과 영상 등을 활용하여 연출하며 그곳이 마치 해변인 듯 꾸몄다. 나비의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이 전해졌다. 로비스가 느낄 새로운 감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듯이 여유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처럼 소설과 연극은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상상의 자유도와 정도, 구체성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매력을 지키면서도 이야기를 온전히 전한다. 책과 무대가 다른 만큼 같은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문장으로 완성되어 전해졌던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마주한다. 이 특별한 경험을 할 기회가 많은 이에게 주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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