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라이선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어리석은 증오가 어떻게 한 생명을 파괴하는지 낱낱이 해부하는 공포극과 다름없다. 남녀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는 결말로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대표 희곡으로, 엄청난 비극이지만 그의 4대 비극에 들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이 자초하여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다. 어떠한 어리석음이나 성격적 결함이 아닌 외부 환경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한다. 청춘 남녀의 죽음 뒤에야 도시 베로나에 평화가 깃든다. 그리하여 비극과 희극 사이의 묘한 경계에 걸쳐있다고 생각한다.
한전 아트센터에서 3월 24일부터 5월 31일까지 공연을 올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풍성한 넘버와 화려한 안무, 세트장이 상당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도시 베로나를 관장하는 두 가문 '몬태규'와 '케퓰릿'의 갈등이 안무 동선, 노래, 의상으로 확연히 드러난 점이 인상적이었다. 케퓰릿은 붉은색 옷을, 몬태규는 파란색 옷을 입고 무대에 대거 등장해 춤추며 노래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특히 붉음과 푸름의 대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문의 꼬리표처럼 보인다. 널찍한 무대에 정교한 세트, 고품질 음질은 마치 베로나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무엇이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였는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 이와 결혼을 앞두게 된 줄리엣. 한참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열여섯 소녀는 가면무도회에 나갔다가 우연히 로미오를 마주친다. 그들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다. 그도 잠시, 로미오를 발견한 줄리엣의 오빠 티볼트가 나타나 훼방을 놓는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둘은 서로를 향한 끌림을 뿌리칠 수 없었고, 몰래 약소한 결혼식까지 올린다.

분노한 티볼트는 몬태규 가문을 찾아가고 싸움이 벌어진다. 격투 끝에 티볼트가 로미오의 형 머큐시오를 살해한다. 칼을 맞고 쓰러진 머큐시오, 그저 여리고 맑은 로미오의 눈에 절규가 맺힌다. 다 쓰러져가는 머큐시오가 로미오에게 유언을 남기는 모습을 보며 내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줄리엣을 죽여버릴 것처럼 도발하던 머큐시오가 헐떡이며 뱉은 말에 그의 진심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로미오, 줄리엣을 지켜줘야 해."
그는 죽기 직전에야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싸움을 좋아하고 껄렁껄렁해 보였던 머큐시오도 실은 사랑과 평화의 품이 그리웠던 거다. 그는 몬태규의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싸워야 했고, 항상 증오와 광기에 찬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어쩌면 그는 죽기 직전에야 솔직할 수 있었고,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를 누렸을 거다.
형 머큐시오의 죽음으로 이성의 끈을 놓은 로미오가 티볼트를 살해하고, 두 가문 사이의 골은 더욱더 깊어진다. 로미오는 베로나에서 추방되고, 한순간에 오빠 로미오를 잃게 된 줄리엣은 깊은 슬픔에 잠기지만, 어떻게든 로미오를 되찾기 위해 술수를 쓴다. 주례를 선 신부님께 깊은 잠에 빠져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약을 건네받은 것이다. 자신이 깨어났을 때 로미오가 곁에 있을 거라는 희망 하나로 위험한 도박을 한다. 하지만 로미오는 줄리엣의 술수를 알지 못한 채, 그저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줄리엣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찾아온 로미오를 보며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잠에 이른다.
아들, 딸을 잃은 몬태규와 케퓰릿 가문은 그제야 화해에 이른다. 복수는 복수를 낳기에 누군가 멈추지 않으면 끝낼 수 없다. 무대에 배우들이 대거 등장해 노래하고 춤추며 신을 찾는 장면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이 느껴졌다. 뮤지컬의 좋은 점은 눈앞에서 생동감 있게 펼쳐지는 열연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관객'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제삼자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게 되고, 나 자신 혹은 세상의 모순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게 된다.
증오와 혐오의 굴레를 끊는 데에 꼭 신의 개입이 필요할까?
뭐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외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뮤지컬 노래 '세상의 왕들'처럼 우쭐거린다. 복수에 복수가 이어지는 맥락은 21세기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무인 드론을 날려 사람들을 살상하고 우주까지 개척하려 드는 시대에 대체 왜 '증오와 혐오'의 굴레를 끊는 것은 신의 몫으로 돌리는 걸까?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은 어린 남녀의 철없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가문의 어른들은 신에게 해답을 달라 부르짖었지만, 어린 로미오와 줄리엣은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다. 그들은 권력, 명예와 상관없이 자신들이 정답이라 생각한 것을 찾아 떠났다.
세상의 왕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우쭐대지만
그들은 모르는 우리 세상 여기선 우리가 왕이라는 걸
세상의 왕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 생각하지만
그 자리는 외롭고 고독할 뿐
춤추는 우리가 왕이라는 걸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살아가지
무릎 꿇고 아부하는 그런 삶은 필요 없어
(...)
세상의 왕 모두 겁쟁이들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지
세상의 왕 모두 서로 싸워
하나뿐인 그 자리를 위해
그들이 전쟁을 즐긴다면
우린 소중한 인생을 즐기지.
가사에 등장하는 하나뿐인 자리는 '하나뿐'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좁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왕'이라 하면 최고 자리에 군림한 존재 같지만,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세상의 왕'은 그저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겁쟁이일 뿐이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계속해서 딛고 올라설 수밖에 없는 '하나뿐인 자리.' 로미오와 줄리엣을 포함한 두 가문의 청춘들은 그 자리에 앉느니 밑바닥에서 춤추며 살아가길 원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복수가 복수를 낳는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며 사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 '사이다', '참교육'과 같은 해시태그를 달고 SNS상에서 공유되기도 한다. 피의 복수는 비단 개인들 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국가를 끌어 나가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심히 두드러진다. 각 진영 간의 극심한 사상 다툼은 세계적 규모의 전쟁을 낳기도 하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저 10대 20대에 불과했던 어리고 젊은이들이 베로나에서 흘린 피처럼 말이다.
뮤지컬을 보기 전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연을 관람한 후에는 단순히 가볍게 소비할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이 담긴 가사와 배우들의 열연, 무대의 웅장함은 우리가 모두 아는 이야기에 신선함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뮤지컬의 주연 배우들은 더블 캐스팅이 이루어져, 각기 다른 느낌의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인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관람한 회차는 뉴 로미오, 장혜린 줄리엣의 호흡이 돋보였다. 특히 장혜린의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는 슬픈 사랑에 빠진 16세 소녀 줄리엣을 완벽히 소화해 냈으며, 뉴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청년과 소년의 아슬한 경계를 녹여내기에 충분했다. 전쟁에 관심이 없던 무해한 소년 로미오. 하지만 끝내 티볼트를 살해하고 추방당하며 사랑하는 줄리엣을 지키지 못한 로미오. 뉴는 등장부터 퇴장까지 피해자와 가해자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로미오의 위태로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특히 원혁 머큐시오는 '증오와 광기'라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혼을 짓누르던 철 가면의 무게를 벗게 된 '머큐시오' 캐릭터 그 자체였다.

현시대에 시사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로미오와 줄리엣>. 2001년 프랑스 초연 이후, 2009년 한국에서 라이선스 뮤지컬로 극을 올린 바 있다. 2026년에 돌아온 공연은 5월 31일까지 계속된다. 사랑해도 죽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해서 죽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리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