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중략)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개정증보판)』, (복복서가, 2024), pp.220~221


illust by 아현(雅玄)
해외로 도망가고 싶다.
그런 강렬한 욕망을 처음 느낀 것은 고3때였다. 수능이 다가오고 있었고, 세계사 수능특강을 질릴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면서 각종 사건과 흐름을 머릿속에 입력하던 무렵이었다. 서양사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계사 과목의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리스가 너무 가고 싶었다. 그리스로 도망가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입시를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언어가 통하지 않지만, 그래서 아무도 내 존재를 신경쓰지 않을 것만 같은 곳에서 철저한 이방인으로 혼자 존재하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어서 몇 차례 해외여행을 갔다. 그리스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일본은 대학생이 가기에 제일 간단한 국외 여행지였다. 가깝고, 시차도 없고, 안전하고 청결하다. 더군다나 친구들 중 한 명쯤은 으레 간단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아 심각한 곤란을 겪을 일도 없었다.
선뜻 먼 곳으로 떠나기엔 나는 걱정이 많았고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휴학하면 혼자 유럽을 가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중이지만 꾸준히 '절대 안 된다'는 반응이 돌아오고 있다.
이제 막 이십대 초반의 딸을 향한 부모님의 염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뿐인 외동딸이니 더더욱. 게다가 모순적이지만 나는 집을 제일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여행에서도 철저하게 계획하고 움직인다기보단 느슨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바란다. 그럼에도 몇 번 일본을 다녀오다 보니 또 다른 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부모님은 안전만큼이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걱정하시지만, 실은 그 타자성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종류의 것이다. 세상에 오로지 나만 남아서 내게 집중하는 감각. 혼자 떠나면 심심해할 게 뻔하면서도.
나는 한동안 그 모순된 감정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를 읽으면서 나는 그 근원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인기가 많은 탓에 대출중인 데다가 예약중인 경우가 빈번했고, 그렇게 바쁜 일상에 자주 잊고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님의 첫 해외여행, 여행이 가진 아이러니, 여행자가 가진 양면성(노바디와 썸바디), 환대와 신뢰, 떠나고 머무는 일련의 행위―그러니까 여행에 관해 작가님 본인과 아내분의 어린 시절이 미친 영향을 접하게 되었다. 나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여행에 대한 관점들을 정리하고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어주었다고 할까.
이제 방학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고, 이번 방학에 해외를 한 번 다녀온 시점에서 또 새로운 곳을 가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음에 가게 될 여행지를 조금 낯설어진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