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을 잔뜩 매단 챙 모자, 캐리어에 척 얹은 구둣발, 왜소한 체격과 삐져나온 새하얀 백발. 큰 검정 캐리어에 나는 덜컹덜컹, 하면서도 최대한 자세히 뜯어봤다. 반짝이는 모자에 주체 못하고 힐끔거렸다. 연극 동아리 선배가 연기 지도 때 내린 낯선 숙제가 있었다. 버스에서 아무나 골라 한번 열심히 모방해 보라고. 그 할아버지는 모방하기 좋은 '인물'이었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으로 캐리어 손잡이를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구둣발을 바삐 움직이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같은 리듬으로 노란 손잡이를 두드려보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면 나도 돌려봤다. 그날은 한 시간의 여정이 어찌저찌 금방 갔던 것 같다.
이내 나는 목적지에 내려 부리나케 학원으로 달려가, 10시부터 18시까지, 바쁜 사명감으로 일을 했다. 5시 40분. 결석한 아이들이 많아 일이 조금 일찍 끝났다. 원장님에게 짧게 인사드리고 컴퓨터 끄고 코드를 뽑았다. 모두가 떠나고 열기가 싹 가신 학원을 나와, 주머니에 손을 넣고(껌 종이와 휴지가 바스락거렸다) 눈이 잔뜩 쌓였을 정류장으로 향했다. 눈이 펑펑 오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500번과 550번, 단지 두 개였다. 버스는 10분가량 남았다. 수선집 앞 정류장에서 손을 호호 불며 버스를 기다렸다. 겨울의 한 중간이라, 어둑해지던 5시 50분경 익숙한 캐리어와 모자에 매달린 에메랄드빛 부자재가 보였다. 곁눈질로 열심히 봤던 그 할아버지였다. 정류장 부근에 무방비하게 세워둔 검정 캐리어 주변을 마치 '사랑은 비를 타고'의 진 켈리처럼, 자유롭게 거닐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도 하고, 수선집 앞에 나란히 놓인 빈 화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기도 했다. 캐리어에 답이 있을 것처럼, 그 캐리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버스가 언제 오려나?”
혼잣말의 어투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얇고 어딘가 섬세했다.
“아 제가 한 번 봐드릴게요.”
“...”
“5분 정도 남았네요.”
“550번이 잘 안 와.”
“그러게요. 여기 버스 잘 안 오더라구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의 '정류장 토크'에서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시시콜콜하게 대화를 나눴다.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동지로서, 눈 펑펑 내리는 날 공주 버스의 배차 간격에 대해 함께 불평하는 일시적 동맹관계로서. 나는 캐리어에 대해 물어보기로 했다. 버스에 탄 순간 우리는 다른 의자에 앉아 각자의 창문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길 것이기 때문이다. 난 할아버지가 앉은 곳으로 가 캐리어에 관해 물을 용기가 없을뿐더러, 우리 대화에 꽂힐 사람들의 곁눈질을 감당할 수 없었다.
“어르신 혹시 캐리어에 뭐가 들었나요?”
“연장.”
내가 아는 연장이라곤 공구 연장 정도여서, 잠시 당황했다. 7~80대 할아버지가 캐리어에 공구 연장을 넣어 버스로 공주와 세종을 오갈 일이라면...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실 연장이라는 건, 그저 삶과 일에 활용되는 모든 도구를 의미하는 데도.
“연장이요?”
“응. 나는 가세질 하는 사람이야.”
못 알아들었다. 가세질이라는 단어는 도무지 처음 듣는 단어였다. 할아버지는 내 표정을 무심히 살피더니,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재단. 재단사여.”
“재단사요? 와, 멋있으시다.”
“멋있긴 뭐….”
배시시, 웃는 얼굴에 뻣뻣한 머쓱함과 으쓱함이 담겼다. 역시 휘황찬란한 에메랄드빛 모자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예전엔 여기저기서 다 불러줬는데, 근데 요즘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
“네?”
“경기가 안 좋아. 자영업자들은 땅에서 기는 거지 뭐.”
아 네, 그렇군요. 정도의 반응을 해야 하나, 위로를 해드려야 하나. 여러 고민이 스쳤다. 어떤 방안이나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할아버지도 그것을 원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오르락내리락하겠죠. 괜찮아질 거예요.”
“정부에서 계속 안 좋아진다 하더라고. 전 세계가 다 그래.”
할아버지의 헛헛한 눈빛에 동반되는 정적. 내가 어루만질 수 없는 그 헛헛함에 빠지고 싶지 않아 주제를 돌렸다.
“아 근데 어르신 모자가 너무 멋있어요. 직접 만드신 건가요?”
또다시 배시시 웃는다. 처음 보는 광경에 빛나는 어린아이의 눈처럼, 할아버지의 눈이 반들반들했다.
“내가 이런 거 만드는 사람이지 뭐... 요즘엔 찾아주지도 않지만 가아끔 혼자서 만들기도 하고...”
“너무 멋져요. 정말로.”
듣자 하니, 할아버지는 그 캐리어를 끌고 공주에서 조치원, 평택 어디든 재단을 할 일이 생기면 달려가시는 분이었다. 캐리어는 출장 재단에 꼭 필요한 할아버지의 요술 상자였다. 코너를 돌아 550번이 오고 있었다. 검은 물 먹어 진흙처럼 끈적해진 눈밭을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내 기술은 또 저기 어디야.. 강남 터미널 가면 알아주지. 거기서만 20년을 했어.”
할아버지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고, 캐리어를 번쩍 들었다. 우리는 550번을 탔다.
같이 앉아야 하나? 가능하다면 할아버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선, 어쩌다 재단 일을 하시게 되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그리고 출장을 다니며 만났던 손님 중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도 궁금했다. 둘이서 앉을 만한 자리는 다 차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날 아침과 똑같이 나는 대각선 뒤, 재단사 할아버지는 대각선 앞에 앉아 캐리어에 다리를 척- 올렸다.
‘가세’ - 옷감, 종이, 머리털 따위를 자르는 기구.
아. 가세는 재단 가위구나. 가세질을 한다는 것은 가위로 천을 자른다는 뜻이었구나. 캐리어를 두드리던 그 손에 색색의 천과 묵직한 재단 가위가 들린 모습을 상상했다. 집중할 때 찌푸려지는 인상, 툭 튀어나오는 아래턱 따위를 떠올렸다. 할아버지의 인생 중 몇 년이 ‘가세질’의 나날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스스로를 '가세질하는 사람'으로 소개한다는 건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애정과 세월을 의미할 것이다. 빛나는 눈, 에메랄드 부자재, 삐딱하게 얹은 모자와 캐리어에 얹은 발을 다시 한번 생각하다가 잠에 들었다. 한 30분 잤을까, 어깨 부근을 툭, 치는 손길에 급히 눈을 떴다.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목적지 세종까지는 조금 더 남은 것 같았다. 괜히 민망해서 눈을 다시 감으려는데 할아버지가 말했다.
“안 내려? 세종이여.”
“아, 어르신 저 좀 더 가야 돼요.”
“아 그래? 난 내릴 때 된 줄 알았지..”
아, 그래서. 그래서 보고 계셨구나. 자다가 못 내릴까 봐.
“어르신 운행 중에 일어나시면 안 돼요!”
휘청휘청 서 있는 할아버지를 향한 버스 기사의 호통이 들렸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할아버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15분 정도 더 달리니 우리 집 앞이었다. 인사를 드릴까? 내리면서 스쳐 가듯 인사를 건네야 이 만남이 어색하지 않게 끝나려나? 나는 결국 자연스러운 작별 인사를 위해 할아버지 곁의 정차 버튼을 찾아냈고, 그것을 누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듯 할아버지 쪽으로 향하며 인사를 드렸다.
“조심히 가세요 어르신.”
“그래, 잘 가!”
활짝 핀, 호탕한 인사였다. 아침에 만난 할아버지를 저녁에 다시 만난 것도, ‘가세'와 함께한 삶을 맞닥뜨린 것도, 지루한 하루를 건드린 작은 사건 정도였다. 긴 대화도 아니었고,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많지도 않았다. 550번을 탄 '가세 할아버지'를 또 만난다면, 그땐 몇 개의 질문을 준비해 가야지, 싶었다. 얼마 안 가 복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며 할아버지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재단 도구로 가득 찬 할아버지의 캐리어는 꽁꽁 언 도로 위를 몇 번을 굴렀을까. 그의 손은 아직 천과 가위를 만지고 있으려나. 에메랄드빛 부자재는 여전히 반짝이려나. 일상의 대화를 나누면서도 빛나던 그 눈은 여즉 남는다. 지나치는 인생들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살면서 얼마나 될까. 그날 난 가세 할아버지의 인생 한 조각 정도, 그중 가장 작은 조각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머지는 내가 다 낭만화하고 상상했다. 휴대폰 메모장에 시를 쓰듯 그날의 일을 기록했다. 당사자가 들으면 하하 웃을 만한 '가세 할아버지'라는 별명 또는 사건 제목도 붙였다. 그래서 그런지, 한겨울, 정류장에 서 있다 보면 가끔 어깨를 으쓱하며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올리던 그 할아버지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