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라켓소년단>에서 천재 배드민턴 소년으로 강렬한 눈도장을 찍었던 배우 탕준상. 그가 성인이 된 후 첫 뮤지컬 주연으로 <데스노트>의 'L(엘)' 역할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극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뮤지컬 아역 시절부터 드라마 출연까지 다져온 탄탄한 연기력과 독보적인 캐릭터 소화력을 지닌 그가, 이미 대중성과 작품성을 완벽히 인정받은 이 레전드 뮤지컬안에서 어떤 에너지를 뿜어낼지 온몸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OD company
그 이끌림은 결국 캐스팅 조합을 달리해 가며 극장을 세 번이나 찾게 만들었고, 마침내 내 마음속 최고의 조합이자 완벽한 양극단에 선 두 인물, 고은성 라이토(고라이토)와 탕준상 엘(탕엘) 페어를 만날 수 있었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정의'를 이야기하며 시작되지만, 결국 인간의 오만과 허망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의 정의는 잘못되었다고 믿는 천재 고등학생 라이토가 우연히 ‘데스노트’를 손에 넣고, 자신의 기준으로 악인을 심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를 막으려는 또 다른 천재, 명탐정 L이 등장하면서 두 사람의 치열한 두뇌 게임이 시작된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점은 백의 선과 흑이라는 악의 대결, 그리고 결국은 자신만의 정의에 지나치게 집착한 인간들, 무대효과와 생각할 지점이 많은 점이 깊은 여운을 줬다.
1,380장의 LED 패널이 만들어낸 초현실적 공간
티켓을 확인하고 어두운 객석으로 들어서는 순간, 무대 위 스크린에 째깍째깍 돌아가는 무수한 시침들이 시선을 압도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오프닝 연출인 줄 알았으나, 그것이 극 중 사신들이 바라보는 '인간들의 남은 수명'이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붉은 시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섬뜩해졌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논레플리카 작품으로 원작의 대본과 음악은 유지하되, 연출이나 무대 디자인은 각 국가의 프로덕션이 자유롭게 창작하고 바꿀 수 있다. 덕분에 이번 한국 프로덕션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인 무대를 탄생시켰다. 물리적인 무대 장치를 최소화하는 대신, 사방을 둘러싼 1,380장의 초대형 LED 패널과 초고화질 레이저 프로젝터를 활용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완벽히 허물었다. 바닥과 천장의 경사를 극한으로 기울여 투시점을 극대화한 미니멀한 무대는, 3차원의 공간을 순식간에 거대한 스크린으로 만들어 라이브 영화를 앞에서 보는 듯 실감나는 몰입감을 줬다. 이 혁신적인 LED 무대로 세계적 권위의 디자인 어워드‘iF 디자인 어워드’에서 국내 공연예술계 최초로 <데스노트>가 실내 건축 부문에서 수상했다. 또한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 4관왕을 휩쓴 이 놀라운 무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거대한 장치였다.
'귀공자 엘리트'와 '냉혈한', 두 얼굴의 고은성 라이토
사진 출처: OD company
고은성이 그려내는 라이토는 그 어떤 캐스팅보다 단정하고 완벽한 '엄친아'의 정석이다. 귀공자 같은 마스크와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발성, 단정한 스타일은 "세상의 잘못된 정의를 바로잡겠다"고 외치는 엘리트 모범생의 설득력을 가중시킨다.
오프닝 넘버 "정의는 어디에"에서 그는 법망의 구멍을 비웃으며 이 사회의 정의가 바보 같은 권력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냉소적으로 주장한다.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과 지적인 목소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동조를 자아낸다. 그러나 데스노트를 손에 쥐는 순간, 그의 내면은 순식간에 까맣게 물든다. 넘버 "데스노트"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공포에 떨며 노트를 버리려던 평범한 소년은, 넘버의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내가 새로운 세상의 신이 되겠다"며 확신과 광기어린 목소리로 변해간다.
특히 고은성 라이토의 진가는 사소한 관계 속 '표정의 대비'에서 폭발한다. 동생 아가미 사유가 "키라의 행동은 잘못되었어, 오빠처럼 다정한 사람이 진짜 내 히어로야"라고 노래할 때, 그는 동생 앞에서는 따뜻하고 든든한 오빠의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동생이 등을 돌리는 찰나, 그의 얼굴에서 온기가 순식간에 싹 가시며 그의 눈빛은 싸늘하게 굳어버린다. 그 짧은 찰나의 변화들이 냉혈한을 그대로 보여줬다. ‘선을 지켜야 한다. 마음 속 굳건한 정의를 지켜내야 한다’고 아들을 다독이는 아버지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알아요 언제나 아버지 뒷모습 보면서 자랐어요‘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가도, 아버지가 돌아서자마자 조소 섞인 차가운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응시한다.
노트로 시나리오를 작성해 FBI 수사관을 지하철역에서 살해할 때도, 고라이토는 사고를 당하는 그를 확인하고 뒤돌아보며 후드 그늘 속에서 씩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끔찍한 순간 앞에서 죄책감이나 두려움은 하나도 없이 확신만 남아있었다. “범죄자들과 나를 막으려는 사람들도 없애는, 내가 곧 정의다.“ 그가 해석한 비열하고 잔인한 라이토에 소름이 돋았다. 권력을 손에 쥔 인간이 스스로를 정의라 착각하며 어떻게 괴물로 변해가는지 보여주는 섬뜩한 초상이었다.
초현실적 아우라와 천재적 집녑과 광기: 엘(L) 그 자체인 탕준상
사진 출처: OD company
1막 중반, 이 극의 판도를 바꾸는 천재 명탐정 엘(L)이 드디어 무대 위에 첫 등장한다.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오직 단독 조명 하나만을 받으며, 온몸을 웅크린 채 맨발로 앉아 있는 한 소년. 바로 탕준상 엘이다. 라이토는 극 처음부터 등장해 넘버와 연기를 통해 관객과 서사를 쌓아온 반면, 엘은 1막 중반이 되어서야 뒤늦게 등장한다. 이미 라이토가 쌓아 올린 서사의 밀도와 맞서야 하는 불리한 위치임에도, 탕엘은 고라이토의 존재감에 전혀 밀리지 않는 독보적인 아우라를 뿜어낸다.
특히 그의 첫 등장과 동시에 시작되는 넘버 "게임의 시작"은 관객들을 전율하게 만드는 최고의 순간이다. 무대 위에 선 탕엘은 이미 라이토의 머릿속과 분노 가득한 내면을 완벽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라이토의 주장이 그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단숨에 짚어내며, 탕엘은 맹수처럼 번뜩이는 눈빛으로 으르렁거린다.
"정의를 외치는 목소린 공허한 말장난. 순교자 행세를 해봤자 너는 위선자야. … 알지도 못하는 세상을 멋대로 색칠해. … 거창한 이상을 내세운 건방진 멍청이. 생명을 가지고 놀면서 착각에 빠졌어. 세상에 겁날게 없겠지 신이 된 것처럼. 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사진 출처: OD company
이 킬링 파트를 뱉어낼 때의 장악력과 압도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탕준상은 진짜 미친 사람처럼, 당장이라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시오패스적 광기를 두 눈 가득 담아 연기한다. 그의 광기어린 표정과 날렵한 움직임이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이 역동적이라, 관객들은 저 가사 속에서 그가 또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감정을 터뜨릴지 숨죽이며 집중하게 된다. 이 무대 하나로 엘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가 관객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탕준상의 L은 원래 만화 속 캐릭터가 그대로 무대 위로 튀어나온 듯한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중저음의 단단하고 흔들림 없는 꽉 찬 목소리는 "너를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확신을 준다. 게다가 심하게 굽은 거북목 자세로 소파 위에 맨발로 무릎을 굽혀 웅크린 채, "제대로 앉으면 추리력이 40% 감소한다"며 태연하게 농담을 던지는 모습은 원작의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개성을 그대로 살려내 관객들을 웃음 짓게 만든다. 빠른 두뇌 회전을 위해 끊임없이 사탕을 입에 물고 다니고, 딸기를 특이한 자세로 쉬지 않고 먹는 디테일도 살아있다.
사진 출처: OD company
특히 놀라운 것은 그의 신체 연기다. 어려서부터 뮤지컬에 꾸준히 출연했고 변성기 시절엔 드라마에 꾸준히 출연하며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던 탄탄한 운동신경 덕분인지 몸을 쓰는 방식이 대단하다. 극의 거의 모든 씬에서 맨발로 등장하는 그는, 그 딱딱하고 경사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LED판 무대 위를 맨발로 뛰어다니고 점프하며 격렬한 연기를 소화한다. 신체의 고통은 잊은 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민첩하게 무게중심을 이동하는 신체 능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개성 뒤에 감춰진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게임의 시작“넘버 후반부에 폭발한다. 눈을 부릅뜨고 진실 너머를 꿰뚫어 보려는 집착과 집념은 섬뜩하리만큼 차가웠다.
동시에 원작의 L과 가장 나이가 비슷한 젊은 탕엘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천진한 매력도 돋보였다. 미사와 처음 인사하며 잔망스럽게 미사의 아이돌 포즈를 똑같이 따라 하는 애드리브나, 라이토와의 테니스 시합 전 준비운동을 하며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귀여운 디테일. 이러한 탕엘만의 애드리브는 무거운 극에 유쾌한 숨구멍을 틔워주며 관객들을 탕엘의 인간적인 매력 속으로 끌어당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폭발적 시너지: "놈의 마음속으로"
사진 출처: OD company
이 극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단연 라이토와 엘의 듀엣 넘버이자 팽팽한 기 싸움의 정점인 "놈의 마음속으로"이다. 이 넘버 하나를 보기 위해 기꺼이 회전문을 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렬한 락 사운드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LED 화면으로 완벽하게 구현된 테니스 코트는 배우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유기적으로 회전하고 분할된다. 관객은 마치 테니스 코트 전체를 바라보며, 두 사람의 테니스 치는 모습을 각각 눈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라켓을 휘두르고,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오직 서로의 눈동자만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고은성과 탕준상의 페어 합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한다. 겉으로는 침착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하지만 점차 거센 승부욕에 휩싸여 감춰둔 속내를 드러내며 숨이 가빠오는 라이토. 그리고 온몸의 에너지를 쥐어짜 내며 상대를 코너로 몰아붙이면서도, 결국 자신 역시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마는 엘이었다.
사진 출처: OD company
특히 L은 딱딱하고 경사진 LED 판 위를 오직 맨발로 뛰어다니며 코트 위를 펄펄 날아다니며 엄청난 점프와 스텝으로 무대를 휘젓는다. 라켓소년단에서의 배드민턴 천재 역할을 맡은 덕분인지 그의 자세는 완벽했다. 또한 고은성의 단단하고 웅장한 성량에 한 치도 밀리지 않고 탕준상이 묵직하고 폭발적인 성량으로 맞받아칠 때, 치열하게 맞붙는 라이벌 구도에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사신들의 시선과 의상에 깃든 인간사의 허망함
사진 출처: OD company
인간들의 피 터지는 두뇌 게임을 한 걸음 물러서서 관망하는 사신들의 묘사는 이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더한다.
넘버 "불쌍한 인간"은 사신의 냉소적인 시선을 빌려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허망함을 예리하게 찌른다.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끝없이 주워 담듯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좇아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운명 앞에서는 한낱 코미디이자 부질없는 춤사위로 비친다. 결국 인간들이 목숨 걸고 집착하는 모든 사랑과 증오조차 사신의 손끝에 달린 허무한 장난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통찰이 극의 묵직한 중심을 잡아준다.
사진 출처: OD company
사신들의 의상과 오브제 또한 이 메시지를 대변한다. 인간을 그저 따분함을 덜어줄 장난감으로 보는 검은 사신 류크는 인간의 뼈조각을 갖고 노는 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하얀 사신 렘은 인간의 사랑에 연민을 느끼며 그들을 이해하려 하기에, 인간의 근육과 뼈를 형상화하여 무언가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듯한 의상을 입고 있다. 하지만 그 안은 텅 비어 있어, 인간의 사랑과 죽음이 가진 지독한 공허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키라" 넘버에서 자신을 구세주라 칭송하는 사람들을 보며 우쭐해진 라이토에게 류크는 촌철살인을 날린다. "네가 세상을 바꾼 줄 안다면 진실을 말해주지. 바뀐 건 네 이름뿐이야. 멍청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야."
결국 라이토는 그저 확률적으로 떨어진 노트를 우연히 주운 불완전한 꼬마에 불과했다. 신은 선택하지도 판단하지도 않는다. 판단하고 선악을 나누는 것은 오직 인간의 잣대일 뿐. 류크가 던진 작은 공책 한 권은 권력을 얻은 인간이 얼마나 오만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가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잔인한 장난이었다.
에필로그: 마침내 도달한 인간의 비참하고도 본질적인 얼굴
사진 출처: OD company
선을 넘으면 괴물이 된다는 아버지의 경고에도 라이토는 폭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엘을 궁지에 몰아넣고 목숨을 건 체스 게임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 명장면이 탄생한다.
데스노트에 적힌대로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눈 엘은 죽음 앞에서도 눈물이 고인 채 "역시 난 틀리지 않았어..." 하고 비웃듯 씩 웃는다. 그것은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해 낸 천재의 처절한 승리 선언이자, 이성을 초월한 집념만이 지을 수 있는 소름 돋는 마지막 미소였다.
그 직후 엘의 숨이 끊어지고, "이제 나의 시대가 시작된다"며 찬란하고 밝은 멜로디를 노래하던 라이토의 오만함은 지독하게 짧았다.
사진 출처: OD company
그 끝에 찾아오는 결말은 한없이 비참하다. 재미가 없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류크는 어떤 가치 판단도 없이 장난감을 치우듯 라이토의 이름을 노트에 적어버린다. 조금 전까지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던 '신세계의 신'은 온데간데없고,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기는 유약한 한 인간만이 남았다. 자신이 심판했던 여느 범죄자들과 다름없이 추악하게 삶을 구걸하는 그 마지막 순간, 라이토는 극 전체를 통틀어 가장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간다운' 민낯을 드러낸다. 신이 된 것처럼 오만하게 행동하더니, 죽을 때가 되어서야 가장 비참하고 인간다운 모습으로 떠나는 그 얼굴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목숨을 걸고 집착했던 엘의 정의는, 그리고 피로 물들인 라이토의 정의는 무엇을 남겼을까. 게임이 끝나면 결국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엘의 깨달음처럼, 게임판 위의 말에 불과했던 나약한 인간들의 아우성 뒤로 류크의 나직한 냉소만이 남았다. 우리는 과연 나 자신만의 정의라는 오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데스노트>가 남긴 이 지독한 질문은, 세 번의 관람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내 귓가에 째깍거리는 붉은 시계 소리로 남아 맴돌았다.
치열했던 이번 시즌의 막은 내렸지만, 이 짙은 여운은 기꺼이 다음 무대를 기다리게 하는 완벽한 이유가 되었다. 데스노트가 다시 펼쳐지는 그날, 나는 주저 없이 또다시 극장으로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