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있어야 할 평일 낮, 일곱 살 퀴니는 뉴욕의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학교 농구부를 위한 모금이라며 돈을 부탁하러 다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퀴니를 무시하곤 한다. 퀴니는 금세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선다. 빈 병을 모아 돈으로 바꾸고, 길에서 발견한 가짜 다이아몬드를 보석상에 가져간다. 가게 앞의 꽃다발을 훔쳐 거리에서 되팔기도 한다.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헤매던 퀴니는 급기야 오픈하우스에 들어가 금색 시계를 훔치려다 중개인에게 붙잡힌다.
퀴니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얼핏보면 어린아이의 작은 모험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호자 없이 도시를 누비는 퀴니의 하루는 그 시작부터 모험이라기보다 위험에 가깝다.
아이가 아는 만큼의 현실
영화는 퀴니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동안 퀴니 부모의 경제적인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는다. 집에 빚이 얼마나 있는지, 가게를 계속 운영하려면 돈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 관객들은 끝까지 알 수 없다. 영화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것은 어린아이의 눈을 통한 몇 가지 장면뿐이다. 퀴니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 ‘다이너스티’가 문을 닫을 상황에 놓여 있고, 퀴니가 하루 동안 모은 돈은 결국 가게의 현금통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그제야 관객은 퀴니가 돈을 모은 이유를 알게 된다.
어른에게는 가족의 생계가 걸린 복잡한 현실이 퀴니에게는 훨씬 단순하게 다가온다. 부모가 걱정하고 있다는 것, 그러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돈이 부족하다면 자신이 벌어 오면 된다는 것. 퀴니가 거리에서 몇 달러를 모으기 위해 온종일 애쓰는 것은 이 단순한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퀴니가 기특할 만큼 영리하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함께 드러낸다. 가짜 다이아몬드가 큰돈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꽃 몇 송이를 팔아 번 돈으로 가게를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카메라는 대부분 퀴니의 눈높이를 따라간다. 그 높이에서 바라본 뉴욕의 건물은 지나치게 높고, 퀴니보다 키가 훨씬 큰 어른들은 화면 위쪽을 가득 채운다. 가족이 처한 현실을 어른의 말로 설명하는 장면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관객에게 허락되는 정보는 퀴니가 보고 들은 만큼뿐이다. 영화는 가난한 가정의 사정을 직접적으로 풀어내기보다, 어린아이가 그 사정을 어떻게 눈치채고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준다.
어른의 몸짓을 빌려서
퀴니가 거리에서 주운 담배꽁초를 입에 물었다가 귀에 꽂는 장면은 이 아이가 어른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퀴니는 어른들이 담배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고, 제법 익숙하게 이를 따라 한다. 그러나 퀴니가 어른들이 담배를 왜 피우는지 그 의미까지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니다. 어른의 몸짓을 옆에서 보고 흉내낼 수는 있지만, 그 행동 안에 담긴 무게는 아직 모르는 것이다. 퀴니가 돈을 버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때문에 퀴니를 단순히 ‘철든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무리가 있다. 퀴니는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어른의 역할을 흉내 내며 어른들의 부담을 덜어내고자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서로가 모르는 서로의 하루
긴 하루 끝에 퀴니는 부모의 식당으로 돌아온다. 엄마가 학교에 잘 다녀왔느냐고 묻자 퀴니는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자신이 모은 돈을 계산대 현금통에 집어넣는다.
부모는 어린 딸을 현실로부터 지키기 위해 가게의 사정을 숨기고, 퀴니는 부모를 돕기 위해 학교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긴다. 가족은 서로를 걱정하지만, 정작 퀴니와 퀴니의 부모 중 누구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각자의 선의에서 비롯된 침묵이 공존하는 것이다.
〈클로징 다이너스티〉라는 제목은 퀴니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 ‘다이너스티’의 폐업을 뜻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에 드러나는 것은 식당의 재정적인 위기만이 아니다. 부모가 숨기면 아이는 모를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마저도 이미 무너져 있는 것이다. 퀴니는 어른이 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어린아이인 채로, 어른들이 숨긴 걱정을 알아차리고 그 몫을 조금 떠맡았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퀴니가 마지막에 뱉은, 학교에 다녀왔다는 짧은 거짓말은 의젓하다기보다 슬프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