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서점에서 우연히 이런 문구를 보았다.
즉 나무란 겉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고쳐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고, 동시에 나무는 한번 상처를 입으면 평생 그 상처의 고통을 몸속에 품은 채 살아간다는 것이 된다.
그 아래에는 “연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딱딱해지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서점지기의 짧은 감상이 덧붙어 있었다. 그렇게 고다 아야의 『나무』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나무』에는 고다 아야가 일본 곳곳을 다니며 만난 나무에 관해 쓴 열다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쓰러진 나무 위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수천 년을 살아온 삼나무가 세월을 견디며, 생을 다한 나무가 목재로 다시 쓰인다.
그러나 고다 아야는 나무를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만 다루지는 않는다. 직접 나무를 찾아가 바라보고, 만져보고, 나무를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그루가 지나온 시간을 짐작해 본다.
「편백」은 이러한 작가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글이다. 고다 아야는 가을에 보았던 편백나무를 이듬해 여름에 다시 찾아간다. 옷이나 음식, 집도 일 년 이상 겪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한 계절만으로 편백나무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8월의 편백나무는 기상이 높다. 멀리서 봐도 나무에 활기가 넘친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여름의 편백나무는 가을에 보았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가을의 편백나무는 오로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면, 여름의 편백나무는 더 크게, 더 굵게 자라려는 의지를 내뿜고 있었다. 가을에 느껴지지 않았던 기세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절을 따라 잠시 잦아들어 있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흔히 편백나무를 좋은 목재로만 기억하곤 한다. 은은한 빛깔과 맑은 향기를 지닌 데다 가구와 집을 만드는 데에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고다 아야는 살아 있는 편백나무보다 가공된 뒤의 쓰임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아쉬움을 느낀다. 나무는 목재가 되기 전부터 산과 들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생명이지만, 인간은 종종 그것이 얼마나 쓸모 있는지만을 기준으로 나무를 바라본다.
고다 아야가 숲에서 만난 두 편백나무는 가까이 자랐지만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한 그루는 곧게 뻗었고, 다른 한 그루는 경쟁하다 공간을 내주면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살아가게 되었다. 비스듬히 선 나무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힘을 써야 했지만, 그 과정에서 몸의 성질이 변해 좋은 목재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애써 버틴 흔적이 인간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결함이 된 셈이다. 그러나 고다 아야는 기울어진 형태보다 그 몸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가 들였을 힘을 먼저 생각한다.
제재소에서 본 또 다른 굽은 나무는 이백 년 넘게 살아온 뒤 잘린 단면을 통해 지나온 시간을 드러냈다. 겉으로는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중심부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오래전 뿌리 부근에 입은 상처를 새로운 나이테로 감싸며 자라온 결과였다. 나무는 상처 입기 전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 흔적을 안쪽에 품은 채 계속 자란다.
가을과 여름의 편백나무, 곧게 선 나무와 비스듬히 선 나무, 매끈한 겉과 상처를 품은 속. 이들은 모두 눈앞에 드러난 한 모습만으로는 한 그루의 생을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좋은 목재라는 쓰임도, 기울어진 형태라는 결과도 그 나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까지 말해주지는 않는다.
고다 아야는 눈앞의 모습뿐만이 아닌, 그 모습에 이르기까지 쌓인 시간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