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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드라마, 영화, 예능, 웹툰. 우리는 다양한 매체에서 젊고 훈훈한 남녀들의 사랑을 접할 수 있다. 가상 혹은 현실의 이야기들은 뜨거운 불꽃처럼 시청자들의 연애 세포를 자극하면서도 여전히 잊지 못한 누군가에 대한 미련, 애절함, 후회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대개는 ‘젊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들로 비치고는 한다. 사랑 이야기를 떠나 꿈과 열정을 좇는 개인과 정착을 앞둔 사회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을 빚는 다양한 청춘들의 이야기는 생생한 몰입과 공감을 자아낸다.


다만 어설픔과 패기로 채워나갔던 20대 초반을 떠나보내고 슬슬 정착이라는 것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온 탓일까. 요즘 들어 ‘젊은 이후의 시기’를 맞이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가령 ‘앞으로는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만 해야 하는가?’라든가 ‘새로운 공부나 모은 돈을 탈탈 턴 여행은 20대까지만 할 수 있는가?’ 같은 것들 말이다. 요즘은 한국도 전통적인 삶의 단계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여전히 ‘철든 어른’이라면 슬슬 포기해야 할 것들이라든가 이제는 ‘어리지 않기 때문’에 주책스러운 것들에 대한 정해진 기준은 남아있는 듯하다.


이런 현실적 고민과 방황 사이에서 최근 접한 단편 영화가 있다. 2025년 78회 칸영화제 라 시네프 1등상을 받은 허가영 감독의 “첫여름”은 60대 노인 여성 영순의 이야기를 다룬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주체’로 다뤄지는 기회가 적은, 젊은 날 가부장제와 고정된 성 역할의 굴레를 따라야 했던 노년 여성의 이야기는 오늘날 청춘을 거쳐 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각자의 찬란함을 포기하지 말 것을 전달한다.




한 가정의 웃어른 영순, 춤을 좋아하는 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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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영화 ‘첫여름’의 스포일러가 다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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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영순은 60대의 여성이다. 그녀에게는 40대 중반의 딸이 있으며 외손녀 또한 장성하여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운 녹색 한복 치마도 맞췄다. 거동이 불편한 남편의 수발도 빠짐없이 들고 있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언제나 가부장적이고 다정하지 않은 남편이었지만 아내로서의 도리는 다하고 있다.


그런 영순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춤이다. 그녀는 음악이 들리면 어디서든 신나게 리듬을 타는 삶을 살고 싶은 여성이다. 어느 날 그녀의 휴대폰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내용은 즉슨 한때 그녀의 춤 파트너이자 애인이었던 학수가 소식이 끊긴 사이 사망했고, 그의 사십구재가 손녀의 결혼식과 같은 날이라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영순은 학수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집안의 어른으로서 손녀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과 처음으로 순수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대상의 연인과의 마지막 이별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처음으로 좋아하는 것을 깨달은 ‘첫여름’


 

현실적으로 영순과 학수의 사랑은 불륜이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현 남편을 뒤로 하고 불륜 상대를 선택하는 자극적인 내용보다는 영순이 가부장적 틀에서 노년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을(손녀의 결혼식) 벗어나 자아를 지닌 한 여성의 주체성을(학수의 사십구재) 드러내는 과정에 가깝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영순에게 이혼이라는 선택지는 없었으며,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불륜 상대인 학수와의 새로운 시작이 아닌 이별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첫사랑’이 아닌 ‘첫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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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떤 여자일까? … 나는, 음악 소리만 나오면, 춤추고 싶어. 성미가 그래. 응. 그래서, 막 춤춰야 돼. 신나. 난 그렇게 살 거야. 어딜가서 살든지.”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학수의 물음에 대한 영순의 답이다. 학수는 영순이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의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춤을 좋아하는 영순’이라는 사람으로 소개한 대상이다. 마치 첫여름이 모든 것을 태울 것처럼 밀려오듯, 영순이 학수를 통해 스스로 ‘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 순간부터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새로운 설렘과 찬란함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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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영화에서 영순은 학수의 사십구재를 선택했다. 영순은 학수에게 ‘어디서든 음악이 흐르면 신나게 춤을 추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마지막으로 이승에 남아있는 날에도 춤을 추었다. 클럽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녹색 드레스와 비슷한 청 푸른색 저고리를 입고, 그대 덕에 나는 잠시나마 ‘영순’으로 살았노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순이 결혼을 앞둔 손녀에게 건넨 ‘모름지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 최고다’라는 대사와도 이어진다.




첫여름은 끊임없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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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첫여름’은 사회에서 가장 등한시되고 있는 노년 여성의 자아와 주체성을 다루어 이들에게 부여되는 가부장적 틀과 고정관념을 비판한다. 영순과 학수의 불륜관계마저 미화될 수는 없겠지만, 결혼식에 참석하여 ‘가족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달라는 자식과 남편의 압박을 떨쳐내고 학수의 사십구재로 향한 영순의 선택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스스로의 마음을 따른 결과일 것이리라.


영화는 언젠가는 노년을 맞이하게 될 청년인 나에게 늙어갈 용기(?)를 주었다. 사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정해진 단계를 거치는 것은 나름 보장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편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이 점점 특정 단계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특정 단계가 내 인생에 반드시 거쳐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마다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의 내가 다가오는 30대의 관념적 특징에 어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조급함을 느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에게 노년에도 뜨거운 사랑과 춤에 몰입했던 영순의 이야기는 소위 ‘정상궤도’를 이탈한 상황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대신 불태울 듯이 진심을 다하는 나만의 첫여름을 겪는 시간으로 보내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틀과 나다운 것 사이에서 균형을 갖추는 지혜가 아닐까.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하는 20대 후반, 결혼을 하고 자녀가 있어야 하는 30대 중반, 내 집이 있어야 하는 40대, 누군가의 부모, 한 가정의 가장. 때로는 다가올 인생의 단계와 역할들에 가려져 이전에는 당연했던 것이 주책맞고 별난 것이 될 때가 있다. 마치 어느 순간부터 어울리지 않게 된 옷들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오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경험과 연륜으로 성숙함을 다지되, 나를 소개하는 언어를 사회적 틀과 고정관념에서 찾지는 말자. 가장 뜨겁게 타오를 첫여름이 찾아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틸컷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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