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동행의 끝, 멋진 하루 [영화]

글 입력 2023.05.0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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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갚아”

 

헤어지고 1년 만에 처음 만난 병운에게 내가 처음 한 말이었다. 병운과 헤어지고 1년 동안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결혼을 약속하며 만나던 사람과는 헤어졌고 이젠 직장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는 상태다. 그때 문득 사귈 때 병운이 빌려 간 350만원이 생각났다. 더 이상 이렇게 안 좋은 상황에 놓여있을 수는 없었고 빌려준 돈만 받자는 생각으로 경마장으로 무작정 병운을 찾아갔다.

 

먼저 헤어짐을 고한 건 나였고, 1년 만에 나타나 병운에게 돈 갚으라며 신경질을 냈는데 병운은 그런 나를 반가워했다. 뻔뻔한 건지 능청스러운 건지, 당황하지도 않는 병운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때는 나에게 돌려받을 돈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돈을 갚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던 것 같다.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돈이 없다는 병운의 말을 듣고 헤어지고 너한테 350만원 받으러 온 나도 나지만, 넌 어떻게 살고 있었던 건지. 그래도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여기까지 왔는데, 무조건 병운에게 350만원을 다 받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이상한 동행이 시작되었다.

 

 

 

이상한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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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운은 나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여기저기 돈을 빌리는 것을 택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인지, 진실과 거짓이 오고 가는 상황 설명을 하니까 사람들은 선뜻 병운에게 돈을 내줬다. 

 

다들 병운의 상황을 모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돈을 돌려받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가 있는 건지.. 병운과 반나절을 함께 하지 않은 나도 그가 돈을 갚을만한 처지에 있지 않다는 건 깨달았는데 말이다.

 

난 돈만 받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니면서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을 듣는 병운이 답답했다. 자기는 화가 나지도 않는지 뭐가 좋다고 넉살 좋게 계속 웃기만 하고 해맑기만 한 모습을 보니까 내 마음이 상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멋진 동행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점점 병운과 돈을 빌리러 가는 길이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병운이 하는 농담 같은 이야기들에 웃기도 하고, 피해왔던 우리의 추억들도 마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좋아했던 캔커피를 사서 건네고 종종 길거리의 연인들을 바라보며 병운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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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사를 시작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병운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병운은 그들에게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병운의 동창이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크게 느꼈다. 자기가 힘들었을 때, 병운이 더 힘들었는데도 도와줬다고. 자기가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며 돈 봉투를 내미는 병운의 동창의 모습을 보며 내가 병운을 너무 한참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병운을 다시 만나고 그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한심하기만 했는데, 병운은 잘 살아온 것 같다. 병운은 가벼워 보일지 몰라도, 사람을 늘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그런 작은 진심들이 사람들에게 닿고 병운에게 다시 전해진 것 같다.

 

그는 그런 마음으로 나도 대했겠지. 항상 나에게 진심이었다는 병운의 말에 그와 만났을 때 내가 꽤 행복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제 와서 한 번쯤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떠날 때의 내 표정에 마음이 아팠다는 병운의 말을 계속 곱씹게 되었다.

 

 

 

동행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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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운을 내려주고 내가 오늘 병운을 찾아 간 이유가 단지 돈을 받기 위해서였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요즘 난 내가 되는 일도 없고 나이에 비해 이룬 것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사람과 세상을 부정적으로 대했다. 그런데 병운과 함께 하면서 차가워 보여도 누구보다는 여렸던 나의 마음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병운이 기억하고, 알고 있는 나의 모습들이 진정한 나를 꺼내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쩌면 병운의 위로를 찾아간 것 같다. 나의 무거운 마음에는 병운이 가지고 있는 가벼움이 필요했다.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 성공 외에도 누릴 수 있는 삶의 여러 모습들. 결코 하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이야기를 병운에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에게 위로받은 마음 덕분이지 않았을까 싶다.

 

병운을 처음 다시 만난 경마장에서 신경질을 내며 전단지를 뜯는 바람에 자동차 와이퍼가 고장 났었다. 병운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 와이퍼를 고쳐놓았는데, 꼭 그 와이퍼가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장 났던 내 마음을 병운과 함께 하는 하루가 조용히 고쳐놓은 것 같은 기분이다.

 

350만원은 끝내 채우지 않았다. 다 채울 수 있었지만, 20만원은 다음에 갚으라고 이야기했다. 다음에 한 번 더 병운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병운과 헤어진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병운과의 만남을 후회할 일은 더더욱 없을 것 같은 하루다. 오늘 같은 멋진 하루가 한 번쯤 더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에 병운이 적어준 차용증을 간직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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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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