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에도 지지 않고 [도서]

일러스트레이터 곽수진과 함께한 미야자와 겐지
글 입력 2022.03.2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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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꽤 오랜만이었다.

 

집 바로 앞에 도서관이 있는 터라 향하는 발걸음이 뜸했던 건 아니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책을 읽는 게, 글을 읽는 게 유난히도 힘이 들었다. 글자를 쳐다보기가 싫고, 그러다 보니 글을 쓸 수도 없었다. 일종의 슬럼프...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시간이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느냐 묻는다면, 아무래도 책 제목과 책 뒤편의 짧은 요약 글이라 답하겠다. 읽고 싶은 책을 정해 놓고 빌리러 가는 경우는 거의 없는지라 도서관에 도착하면 우선 좋아하는 코너에 서서 책장 위부터 아래까지 쭉 훑어본다.

 

눈이 나쁜 편이라 안경을 빼놓고 도서관에 간 날에는 오직 시야에 들어오는 책들만을 살펴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우연히 엄청난 책을 얻어걸리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소리다.

 

그날은 안경을 똑바로 썼고 늘 그렇듯 가장 좋아하는 일본 소설 코너를 쭉 따라 걸었다. 흥미를 끄는 책이 없는 건 여전했다. 그러다 문득 읽고 싶은 책이 생각났다. 요즘 푹 빠져 보고 있는 애니메이션 <치하야후루>에 나오는 ‘백인일수’와 관련된 책이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도서 검색창에 *백인일수(중세 일본에서 100명의 시인들의 와카를 한 사람에 한 수씩 집대성한 와카 시집)를 검색해 봤지만 해당 도서는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일본 시’를 검색해 봤다. 그리고 검색 결과 중 맨 위에 있던 ‘시바타 도요’의 <약해지지 마>를 찾아 나섰다.

  

<약해지지 마>를 비롯한 일본 시집들은 모두 내가 읽을 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수십 번을 지나쳤던 바로 그 코너에 모여 있었다. 책 제목과 책 뒤편 글귀, 그날 나는 그곳에서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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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결코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내 잇속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볏짐을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

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의미 없는 일이나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추운 여름이면 걱정하며 걷고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마음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시집을 읽은 경험은 많이 없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읽은 것을 제외하면 재작년 이름 모를 미국인의 시집을 읽은 게 전부다.

 

작가 소개를 통해 그 이름 모를 미국 시인이 유명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번역으로 전해지는 시의 느낌이 결코 작가가 건네고자 한 감정과 완벽히 일치할 수도, 그렇기에 그 뜻을 온전히 느낄 수도 없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시라는 짧은 문장에 담긴 함축적 뜻을 이해하기 위해 수없이 읽고 노래하고 암기했던 때가 생각난다.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 속에 나타난 청과 백색의 대비, 손님과 청포도의 의미 등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시가 쓰인 배경과 그 속에 담겨 있는 뜻을 풀어내야 했다. 물론 실상을 시험을 위한 시 읽기라 말해야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시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내 마음을 어느 방향으로든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마음에 와닿았다 말해도 되지 않을까. 미야자와 겐지는 단 한 줄의 글로 망망대해를 헤매던 배를 멈춰 세웠다. 방향을 알려주고, 바람을 일으켰다. 몇 달간 그 어떤 글도 읽지 못하던 움츠러든 마음을 움직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정신이 담긴 글은 힘을 잃지 않고 전해진 것이다. 비에도 지지 않고 말이다.

 

아직 춥고 삭막한 겨울이라 생각하였는데 어느 순간 거리엔 초록 새싹이 돋아나 있다. 올해도 이렇게 모진 풍파를 견뎌낸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다시 한번 지지 않고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미야자와 겐지 - 일본의 대표적인 동화 작가이자, 시인. 타인을 위한 삶을 노래하던 그의 작품들은 생전에 주목받지 못하였지만 훗날 재평가 되며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다. 또한 그의 동화 <은하철도의 밤>은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강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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