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간단한 상상을 해봅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방금 막 매우 감명 깊고, 잘 만들어진 연극을 보고 나온 관객입니다.
극장에서 나와, 공연을 함께 봤던 지인과 어떤 대화를 나눌 것 같나요?
아마 어떤 배우가 연기를 정말 잘한다,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무대가 정말 아름다웠다 등의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물론 연극의 텍스트, 희곡에 대한 이야기도 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아는 전통적인 연극에서는 굳이 희곡이 아니더라도 이야기할 다른 부분들이 많습니다. 또한, 관객들은 보통 연극을 '보러' 간다고 합니다. 그만큼 관객에게 있어 연극의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시각적인 부분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연극의 시각적인 부분도, 무대도, 조명도, 심지어 배우 연기의 일부분도 제한해 버리는 연극의 한 형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요소를 걷어내고, 오로지 희곡에만 집중해 낭독하는 형태의 공연을 '낭독 공연' 혹은 '낭독극'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낭독극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우선 '낭독극'의 사전적인 정의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배우들이 대본을 읽는 형태로 진행되는 공연, 주로 동작 없이 배우들의 화술과 목소리 연기로 이루어지며, 대부분은 대본을 외우지 않은 상태에서 대본의 배역을 맡아 읽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공연 제작 전에 희곡의 실연 가능성을 가늠하거나 미리 관객에게 소개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낭독극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은 희곡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때로는 연기나 연출적 요소를 사용하는 '입체낭독극' 형태의 낭독극도 공연된다.
- 남산예술센터 디지털 아카이브
낭독극의 무대는 단순합니다. 특별한 장치, 소품 없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대본을 올려놓을 수 있는 보면대 정도만 있다면 무대가 됩니다. 조명 또한 거의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쓰더라도 장면 전환 정도만 알릴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조명을 씁니다.
낭독을 듣는 관객들은 배우의 목소리만으로 희곡의 모든 내용을 전달받습니다. 관객에게 희곡을 전달하는 배우는 대본을 보고 목소리만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보통의 연극에서와 같이 몰입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상황 전달을 위해 지문을 낭독하는 배우가 따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낭독극은, 연극이 이루어지는 기본 요소인 대사, 그리고 이를 전달하는 배우만 활용해 관객과 소통합니다.
지난 4월 서울연극센터에서 진행되었던 '아시아 플레이' 낭독공연의 무대.
그렇다면 몰입도 어렵고, 시각적인 요소도 없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낭독극을 굳이 봐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낭독극의 핵심과 제일 큰 재미는 그 공백에 있습니다. 희곡 외의 요소가 거의 걷어졌기 때문에, 관객은 대본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즐길 수 있습니다. 관객은 낭독을 들으며, 마치 희곡을 읽을 때와 같이 장면과 상황, 이야기의 흐름을 상상 속에서 직접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낭독 공연은 관객들을 청자로 만듭니다. 관객들이 상상 속에서 무대를 직접 세우고, 장면을 만들어볼 수 있게 함으로써 희곡은 조금 더 가까이서 관객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을 조금 더 능동적인 위치로 끌어올 수 있습니다. 새로운 관객으로서 객석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낭독극은 보통 극의 개발 과정에서, 관객들과 먼저 한번 만나 실연이 가능할지, 관객의 반응은 어떠한지, 혹은 홍보를 위해서 사용됩니다. 낭독극은 대부분 본 공연 전의 미완의 공연이나 쇼케이스 정도로 보는 시각이 많고, 관객들 또한 그러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어떤 식으로 무대화될지 기대할 수 있고, 마치 연극 창작 과정에 참여하는 듯한 몰입도 느낄 수 있습니다.
<보도지침 낭독대회>의 무대.
관객에게 뿐만이 아니라 창작자들에게도 낭독극은 현실적인 면에서도, 예술의 면에서도 매력적인 형식입니다. 우선 낭독극은 준비 시간도, 들어가는 비용도 훨씬 적기 때문에, 조금 더 본격적으로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고, 이를 공연으로 올려 관객과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신진 작가와 연출가가 발굴되고, 배우들은 좋은 일자리를 선택할 기회가 늘어납니다. 또는, 희곡을 좋아하는 관객들이 직접 공연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했던 <보도지침 낭독대회>와 같이 관객의 새로운 참여를 불러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낭독극 안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입체낭독'이라는 형식입니다. 입체낭독에서는 기존의 낭독극 형식은 유지하되, 시각적인 요소들을 조금 더 활용합니다. 배우의 표정 연기, 제스처가 조금 더 들어가며, 연출에서도 간단한 동선과 소품을 넣는 등의 변화가 보입니다. 낭독극의 기본적인 틀 안에서 관객에게 조금 더 새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전되고 있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입체낭독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작품으로 지난 11월 서울연극센터에서 공연되었던 연극 < POOL > 트라이아웃 공연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연에서는 극의 테마에 맞춘 다양한 소품들을 활용하고, 보면대의 위치를 자유자재로 옮기는 등 연극과 낭독극의 사이에 있던 공연이었습니다.
입체낭독극 < POOL >의 무대
낭독 공연은 지금도 여러 목적을 가지고, 관객들과 만나기 위해 계속해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낭독 공연이 만들어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사실 여러분도 직접 낭독 공연을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바로 희곡을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낭독해 보는 것입니다. 낭독에 참여하는 배우도 결국 자신이 연기하지 않는 장면에서는 하나의 청자이기 때문에, 낭독극이 여러분에게 주는 울림은 여전할 것입니다. 제 글이 여러분에게 한 번쯤 낭독 공연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추가로, 낭독 공연은 아예 무료 공연으로 진행되거나 티켓값이 비교적 저렴한 경우가 많습니다. 연극을 자주 보지 않으시는 분이라면 낭독극으로 한번 연극을 접해보셔도 좋고, 혹은 연극을 자주 본 분도 또 다른 관객의 모습으로 객석에 앉아 있는 경험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