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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역사가 덜컹거리던 순간, 가정법이 남긴 흔적 -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공연]

역사와 가정법을 말하는 연극

by 박선주 에디터
2026.06.07 14:12

 

 

‘역사’에서 가정법이 성립할 수 있을까? ‘만약 ~했다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말들. 이미 일어난 사실을 다루는 역사학자에게 가정법은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법의 역사’는 생각할수록 꽤나 흥미롭다. ‘만약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만약 이번 시험에서 한 문제만 더 맞았더라면?’.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수많은 경우의 수 가운데 선택된 하나만이 남은 결과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프랑스 수학자 파스칼의 유명한 말이 있다. 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클레오파트라의 외모가 조금만 달랐더라면 안토니우스를 유혹하지 못해 이집트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결국 이 말은, 개인의 외모 같은 작은 차이가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뒤바꿀 수 있다는 우연성의 힘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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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에서는 이러한 순간들을 ‘역사가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덜컹거리는 순간’ 즉, ‘터닝 포인트’라고 표현한다. 해당 장면에서는 주로 역사적 전환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의 삶 역시 매 순간 덜컹대고 있다. 다만 그 흔들림이 선택받은 한 가지 결과에서만 유난히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나머지 가능성을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극 중 배경이 되는 ‘학교’라는 공간은 한 사람의 전환점을 만들어내기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다. 학교는 흔히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불린다. 그곳에서 맺어지는 다양한 관계, 교육 방식,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들은 알게 모르게 삶의 방향을 만들어 나간다.

 

이 극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환의 순간과 그 과정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품은 서로 다른 두 교육관의 충돌이라는 큰 주제 안에서 인간의 성장과 정체성, 역사와 예술을 해석하는 방식 등을 다루는데, 동시에 극 자체를 하나의 역사처럼 구성한다. 극 중간중간 녹음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의 나레이션은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이 지나간 과거 속 한 장면을 재생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지금 눈앞의 결과뿐 아니라, 그러한 결과에 이르기 전 존재했던 수많은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들까지 함께 떠올리게 만든다. 극장을 떠난 뒤에도 수시로 떠오르는 가정들은 이 극의 그 무엇도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교육이라는 전환점


 

학교라는 공간이 학생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방식 중 하나는 단연코 ‘교육’일 것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가 한창인 이 교실에서는, 극 중 한 인물의 표현을 빌리자면 ‘특질이 상이한’ 두 교사가 수업을 진행한다. 당장의 시험이 아닌 인생을 위한 수업을 하는 문학 교사 ‘헥터’와, 오직 매력적인 시험 답안을 만들기 위한 기술을 가르치는 ‘어윈’.

 

어윈이 학교에 부임하기 전, 극 중 관찰자 및 나레이터 역할을 맡은 인물 ‘스크립스’는 그의 등장에 대해 ‘Clandestine(은밀한)’이라고 표현하며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영국이 군비확장 경쟁을 조장했다.’와 같이 기존의 역사서술을 뒤집고 근거를 찾는 어윈의 테크닉은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의 수업에서 역사는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시험 답안에 있어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학생들은 술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그의 테크닉으로 대학 합격에 성공한다.

 

반면 헥터는 과거의 문학과 예술이 입시를 위한 도구가 아닌 삶을 살아가기 위한 ‘단열재’라 말한다. 그는 어윈과 학생들이 홀로코스트를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하려 할 때, 왜 그 사건들이 전무후무한 비극이었다고 비난하면 안 되는 것이냐며 통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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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두 상반된 가치관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지만, 결국 각자만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어윈의 테크닉을 잘 흡수했던 데이킨은 (린톳의 말에 따르면) 거짓말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세금 전문 변호사가 되었고, 누구보다 헥터의 가르침을 심장에 새긴 포스너는 작가가 되었지만 세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간다.

 

스크립스의 암시처럼, 어윈의 등장이 학생들의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를 같은 곳으로 이끈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역사를 여러 가지 방향에서 바라보길 즐겼듯,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갈래로 나아갔다. 비슷한 전환점을 맞더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변동을 각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였다.

 

흥미로운 지점은 결말이 각 교사가 추구한 교육 방식이랑 닮아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의 발자취를 심장에 새기라던 헥터의 삶은 그의 행동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주변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겼고, 현실화 되지 않은 여러 가능성에 대해 논하길 즐겼던 어윈의 삶은 사고 이후 완전히 뒤집힌다.

 

 


실현되지 못한 것의 가치


 

극은 수상할 정도로 자주 가정법을 제시한다. 꼭 가정법을 사용한 문장이 아니더라도, 과거에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계속해서 언급한다.

 

어윈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담하러 온 포스너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며 장면을 재현하고, 린톳은 헥터의 성추행을 목격한 사람이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하며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헥터의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가정법과 조건문을 이용해서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가정법의 사전적 의미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역사에서 가정법의 사용은 실제 일어나지 않은 상황을 가정함으로써, 결국 실제 일어난 사건을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동시에 과거 선택들에 대한 불확실성을 드러내며 얼마나 많은 갈래가 열려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극은 전환의 지점은 명확히 보여주되, 그 결과에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을 끼워 넣음으로써 자꾸만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그랬더라면/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하나의 결과를 본 듯하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한 여운을 남긴다. 이는 결과적으로 극이 내포하는 아이러니를 더욱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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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확실해 보였던 미래조차도 가정법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극 중 어윈이 데이킨과의 약속에 대해 ‘재밌는 일이 생긴 것 같다.’라고 말하자, 데이킨은 ‘재밌는 일이 생겼다. 가정법이 아니고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정정한다. 하지만 결국 불의의 사고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후 데이킨은 사고만 아니었다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가정법으로 되돌아온다. 확실해 보였던 미래조차 하나의 실현되지 못한 가정으로 남으면서, 극은 결과뿐 아니라 그 뒤에 존재했을 수많은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든다.

 

 

 

가정법이 남긴 흔적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히며 그들의 삶 또한 하나의 역사로 남는다. 19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켜보느라 나름의 정이 든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눈에 담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치열한 교육의 현장에서, 그리고 서로 간의 예상치 못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자신만의 기준을 찾아가던 사람들이 하나의 장면으로 수렴된 순간에는, 그들이 겪어온 수많은 흔들림이 흔적이 되어 그 사진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앞서 역사는 여러 갈래 가운데 선택된 하나의 가능성만이 실현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토록 ‘역사’를 말하는 극에서 ‘가정법의 역사’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적어도 이 극에서 가정법은 사라진 가능성을 호출하여 그것을 하나의 잔상처럼 남겼다. 가령, 극이(스크립스의 나레이션이) 역사가 여러 가능성으로 '덜컹거렸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고 직전의 순간, ‘만약 헥터의 오토바이 뒤에 어윈이 타지 않았더라면.’과 같은 질문은 씁쓸함을 남긴 채 그 이후에도 줄곧 따라붙을 것이다. 마지막 사진에서 묘한 감정이 드는 이유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 여러 가능성들이 그들이 지나온 시간을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는 역사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뒤에 남겨진 수많은 가능성과 흔적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어윈과 헥터의 교육 방식은 너무도 달랐지만, 학생들은 헥터의 흔적 위에서 어윈이 던진 질문들을 품고 각자만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 극 또한 무대 위에 남겨진 그들의 덜컹거림을 관객에게 건네며, 끝내 또 다른 가능성을 오래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결과보다 그 가능성들이 우리를 오래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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