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사람들에게 삶과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고, 변화를 만들어 나갈 기회를 준다. 예술은 삶과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매체이다. 그만큼 사회를 통제하고자 하는 부정의한 권력이라면 예술을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의 역사는 곧 검열의 역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과거부터 예술에는 자주 검열이 적용됐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고 싶은 예술가들은 검열을 우회하는 길을 다양하게 찾아내 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강백의 <파수꾼>과 같이 가상의 세상을 통해 현실을 우화적으로 드러내기도, 지난 5월 상연되었던 <화이트 래빗 레드 레빗>에서 리허설 없이 관객과 배우 모두가 대본을 처음으로 보게 하는 등 독창적인 방식을 택하는 연극도 있었다. 그리고 이 글에서 이야기할 연극 <미러>에서는 가짜 결혼식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검열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연극 <미러>의 배경은 문화부가 모든 예술 작품을 검열하고 승인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극의 등장인물들은 결혼식을 가장한 불법 연극을 올리려 한다. 결혼식의 탈을 쓰고 올라가는 연극은 다름 아닌 검열에 관한 이야기이며, 극작가인 아덤이 희곡을 쓰며 문화부로부터 어떤 검열을 받았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공연이 올라가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검열과 연극 <미러>에 드러나는 검열의 상황은 확연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미러>가 25년의 한국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미러에서 검열에 대한 논의는 예술과 삶이라는, 예술이 가지는 힘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든 자신이 보고 겪은 현실을 그대로 쓰려는 극작가 아덤과 연극을 사랑함과 동시에 작가들이 자신이 원하는 희곡을 그대로 쓰기를 바라는 첼릭이 연극에서 충돌하며, 검열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삶과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미러> 극 중에서 첼릭은 플롯, 그리고 관객을 움직이는 이야기에 관해 아덤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첼릭은 아덤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녹취록 같은 작품이 아니라 플롯이 있는 이야기를 쓰기를 바란다. 첼릭은 검열이 시행되는 문화부의 국장이면서도 연극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고, 그러면서도 결국 검열을 자행하는 사람으로서의 모순을 갖는다.
그리고 연극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극과 플롯의 기원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술은 삶의 모방이었다. 모방은 원래의 대상을 완전하게 재현해 내지는 못하고, 그렇기에 플라톤은 진리로부터 멀어진 예술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달랐다. 현실을 모방한 예술을 보며, 특히 비극을 보며 감정을 이입하고, 오히려 삶의 다른 부분을 알고 지식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극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야 했고, 감정이입에는 플롯이 필수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플롯은 지금까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극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이 전부 인과관계로 얽혀 있어야 한다는 등, 플롯의 규칙을 지킨 작품들은 지금도 사람들이 여전히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잘 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역시도 플롯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미러>에서의 모순은 첼릭이 플롯을 강조하는 데 비해 정작 플롯의 정석과도 같은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줄리어스 시저>는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첼릭과 계속해서 대립하는 아덤은 희곡에서 삶의 왜곡되지 않은 모습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 아덤은 자신이 들은 옆집의 대화를 그대로 희곡으로 옮기며, 첼릭과의 면담 후 첼릭이 대본의 수정을 요구하는 모습 역시도 희곡으로 기록한다. 전쟁을 겪은 아덤이 기록하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플롯 없는 연극의 등장과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세계대전을 겪은 이들에게 실제 세상의 사람들은 고전 작품의 등장인물처럼 이해하기 쉽지 않고, 모순투성이였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삶과 예술 사이의 거리감을 느끼며, 더 현실적인 삶을 보여주기 위해 기존의 플롯을 따르지 않은 예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부조리극, 그리고 브레히트의 서사극 등을 대표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길게 플롯과 예술에 관해 설명한 이유는, 두 종류의 작품이 공존할 수 있으며, 지금 시대에도 두 종류의 예술이 계속 창작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첼릭과 아덤이 각각 원하는 연극의 차이, 그리고 이로 인한 충돌은 예술에서 사실 오랫동안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검열에 맞서는 아덤이 완전한 선인, 문화부 국장인 첼릭이 완벽한 악인처럼 보이나, 중요한 부분은 두 사람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연극 모두가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관객에게 어떠한 의미를 전달하는 연극을 원하고 있으나, 그 방식이 다르다. 첼릭은 고전적인 플롯을 통해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삶을 바꾸는 연극을 원한다. 관객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자리 잡아 온 플롯이 필요하며, 플롯에 따라 기승전결이 있는 연극을 만드는 일은 결국 어느 정도 현실의 왜곡을 불러온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연극처럼 모든 소재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지 않으며, 기승전결이 명확하게 존재하지도 않는다. 결국 첼릭이 원하는 연극은 현실을 모방한다 한들 왜곡을 담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예술의 특징을 이해하고, 창작자가 자신의 말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방법을 찾아 만들어지는 예술이 건강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러>에서 두 사람의 논쟁이 바람직하게 남을 수 없는 이유는 권력에 의한 위치성에 있다. 아덤은 검열받는 극작가의 입장이며, 첼릭은 검열하는 국장의 위치이다. 첼릭은 아덤에게 계속해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연극을 쓸 것을 강요하며 이것은 바람직한 예술 창작 과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동시에 첼릭은 스스로 검열과 권력에 잡아먹혀 하는 말과 행동의 괴리가 벌어지고 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고전적 플롯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글의 초반부에 언급했듯 이 이야기의 구조가 관객에게 가장 큰 감동을 주며,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현실의 불완전한 모방이 일어나는 까닭은 이 왜곡을 통해서만 전할 수 있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첼릭이 그토록 극찬했던 벡스의 연극에서 플롯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물론 이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연극에서는 삶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것이 기존의 사실을 왜곡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짐이 문제이다. 실제로는 참혹하고 절망스럽고, 부조리가 가득했던 전투의 이야기는 연극에서는 죽음에도 주저앉지 않고 돌격하는 군인들의 영광스러운 이야기로 왜곡된다. 현실을 새롭게 보는 것이 아닌 진실을 왜곡된 방향으로 초점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것이다. 진실을 왜곡하려는 권력의 목소리는 메이와 같이 진실을 아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힘도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권력의 말을 대신 발화해 버린 작가의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마치 백스가 이후에 아덤의 연극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첼릭의 대사에서 언급되는 금서인 <로미오와 줄리엣>과 <줄리어스 시저> 모두 첼릭이 그토록 좋아하는 고전적 극작술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들이다. 정작 삶의 일면을 비추는 작품들은 금서가 되는 시대에, 첼릭의 왜곡된 진실을 보여주는 연극이 무대에 당당하게 오르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다. 이러한 점에서 검열이 갖게 되는 필연적인 모순을 엿볼 수 있다.

공연장 내부에 준비되어 있던 포토존
글의 도입부에 이야기했듯 예술의 역사가 검열의 역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는 검열은 예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삶에서 느낀 감각과 생각을 예술에 담아내며, 그 예술에는 대중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할 힘이 있다. 사회를 움직이는 예술은 사회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권력의 통제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앞으로 이야기할 연극 <미러>에서 드러나듯 직접적으로 대본을 검열하기도 하고, 지난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같이 정부에 비판적인 작품의 지원을 배제하는 방향이기도 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2025년에 관객들이 <미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러>의 작가인 샘 홀크래프트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극장에서의 밤이 행복한 경험임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금지된 연극을 보는 일이 어떤 것인지 관객이 조금이라도 느껴보게 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관객의 경험을 위해 <미러>에서 택하는 방식은 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이 관객 자신을 계속 인지하고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연극에서 관객은 계속해서 호명된다. 관객 참여형 연극은 아니지만, 관객 역시고 ‘하객’이라는 지위로 연극의 일부분이 된다.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하객들에게 말을 걸며, 보안국 사람이 극장 근처에 왔을 때 다 함께 축가를 부르며 결혼식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문화부의 등장으로 커튼콜도 없이 연극이 끝나는 순간에도 진짜 첼릭은 관객들에게 계속 주변 사람들이 유치장 동기이니 얼굴을 잘 봐두라고 말하는 등 관객은 계속해서 연극의 일부분으로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미러>의 문화부와 같이 직접적으로 검열을 자행하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하더라도, 검열은 여전히 또 다른 형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과잉 정보 시대에 살아가는 만큼, 오늘날의 검열은 알고리즘, 수많은 정보, 그리고 자신을 검열하게 함으로써 의견을 낼 수 없게 만드는 더 개인 차원에 자리 잡고 있다. 너무 많은 말이 뒤섞여 나의 말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치열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무엇이 검열이고 아닌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나의 말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지. 연극은 끝나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 <미러>의 공연은 끝났지만, 미러가 전하는 메시지를 계속 고민하며 살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