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평범하게 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게 평범한 삶은 무탈하고 평화로운 날들만 있고, 시간과 돈이 여유로운 삶이었다. 그런 삶은 나와 거리가 멀었고 평범한 삶은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 THE LAST'는 그 신념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웹툰과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북한 남파 특수공작 5446 부대의 엘리트 요원들이 남한의 달동네에 잠입하여 신분을 위장하여 임무를 수행한다. 원류환은 동네 바보 동구로, 리해진은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가수지망생으로, 리해랑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산다. 그들은 엘리트요원으로서 충성을 다하지만, 버림 받고 비극적으로 끝난다. 결말까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극장은 1000석의 규모로 매우 컸고, 로비에는 포토존과 MD존이 있었다. 포토존은 단순히 인증샷을 위한 곳이 아니라, 이야기의 세계관이 사실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포토존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포토존을 마주하자마자 화환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컨셉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슈퍼 운영 10주년을 축하하여 보낸 설정으로 인해 현실의 세계관과 허구의 세계관이 연결된 듯이 느껴졌다. 뒤편에 마련된 포토존은 더 실제 같았다. 그곳에는 배달의 단골 품목인 쌀, 순임이의 장부와 일기, 손님들의 방명록(관객들의 응원메시지)이 있었다. 그중 순임이 장부가 눈에 띄었다. 순임이 장부에는 슈퍼를 운영하면서 적은 짧은 글이 있었는데, 억척스러운 순임이의 외면과 달리 여리고 따스한 내면이 담겨 있었다.
뮤지컬 히스토리도 인상적이었다. 2016년에 시작해 26년까지의 역사가 적혀 있었다. 올해 공연을 포함하여 총 6번의 공연을 했고, 8인극에서 12인극 그리고 17인극으로 확장했다. 소극장에서 시작해 중극장을 거쳐 대극장까지 규모를 넓혔다. 10년동안 조금씩 몸집을 키운 과정을 보면서 나까지 괜히 감격스러웠다. 함께 간 남편은 기대감을 더 키우는 데 한몫 했다고 말했다.
위대한 포인트 1. 정신을 쏙 빼놓는 볼거리
문화예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남편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문화예술과 꽤 친해졌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향유하기 전에 약간의 주저함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저함보다 기대감이 앞섰다고 한다. 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다 포토존을 통해 이 뮤지컬의 역사를 알게 되니 주저함은 완전히 사라졌고, 심지어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고 말했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지루함 1도 없이 관람했는데, 그 이유가 화려한 볼거리라고 했다. 정신을 쏙 빼놓는 퍼포먼스가 계속 이어지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가 향유했던 뮤지컬 중 두 번째로 퍼포먼스가 화려한 작품이었다. 앙상블의 군무, 무술 액션 신, 깨알 재미를 선사한 아이돌 공연 같은 무대 신, 클론기법, 화려한 조명 연출까지 눈 돌릴 틈이 없었다.
앙상블의 군무와 액션 신은 단순히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몸짓으로 감정과 캐릭터의 성장을 표현하는 발레처럼, 이 뮤지컬의 군무와 액션에 캐릭터의 내면이 깃들어 있었다. 들개에서 괴물로 길러져야 했던 처지에서 고통을 억눌렀던 내면을 몸짓으로 표현했다.
극 중 리해랑이 오디션을 보는 신에서는 노래와 춤을 보여주었는데, 아이돌 출신의 배우가 해서인지 아이돌 콘서트를 보는 것 같았다. 작은 이벤트를 선물 받는 느낌이 들었다.
동구야 배달 신에서는 동구의 바쁜 일상을 극장 무대의 한계를 넘는 연출을 보여줬다. 여러 배우가 동구의 츄리닝을 똑같이 입고 배달 하는 동구를 연기했다. 그 장면이 인상적이고 신기해서 알아보니 이러한 방식을 클론기법이라고 한다. 그 기법 덕분에 영화에서 보았던 플래시컷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조명 연출도 있었다. 캐릭터가 위장한 신분과 본래 신분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에서는 배우의 양쪽 얼굴에 조명을 번갈아가며 비추어 내면적 갈등을 세밀히 표현했다. 또 국정원이 총을 겨누어 위협을 주는 신에서는 붉은 조명으로 실제 레이저처럼 보이게 했다. 심지어 관객석에서 배우가 나와 총을 겨누어서 현장감과 긴장감이 배가 되었다.
위대한 포인트 2. 무대 연출 (+5번째 줄에서 관람한 후기)
대규모의 극장이라 무대가 큰 편이지만, 다른 뮤지컬에 비해 액션신과 굵직한 동선이 많아서 무대가 작아보일 수 있었다. 이 문제점을 다양한 무대장치를 활용하고, 관객석까지 무대로 활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극복했다. 관객석까지 무대로 사용한 점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관객에게 몰입도와 소속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중앙 쪽, 앞에서 5번째 줄에 앉았다. 바로 통로 쪽은 아니었지만, 그 옆에 앉아서 통로랑 가까웠다. 관객석에서 두 번이나 배우가 등장했는데, 한 번은 우리가 앉은 쪽이어서 마치 나도 5446 부대 요원이 되어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대와 가까운 자리에서 관람하니 표정, 호흡,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아도 끝까지 역할에 충실하는 모습까지 세밀하게 보여서 캐릭터에 심정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배우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관람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대극장에서는 처음이었다. 극장의 규모만큼 커진 무대와 늘어난 배우들 때문인지 전과 다른 기분이 들었다. 그 여운이 꽤 길게 갔다.
위대한 포인트 3. 흥얼거리게 되는 넘버
뮤지컬을 볼때마다 유심히 보는 부분은 넘버이다. 스토리가 탄탄하지 않은 작품이어도 넘버가 좋으면 기억에 오래 남았다. 그만큼 넘버는 뮤지컬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개인적으로 완벽한 넘버는 멜로디, 가사, 작품과의 조화를 모두 갖춘 곡이라고 본다. 이 작품의 넘버들은 모두 완벽한 넘버였다. 심지어 장면이 떠오르는 넘버가 많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뮤직페스티벌이나 콘서트를 즐기고 난 후 했던 우리만의 습관이었다. 그 습관이 뮤지컬 관람 후에도 나오다니, 그만큼 넘버가 좋았나보다.
위대한 포인트 4. 배우의 발견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 THE LAST] 캐릭터 포스터 합본_제공 주다컬쳐_2차 보도자료 사진.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3/20260324201532_pfimhgfd.jpg)
이 뮤지컬에서는 주인공은 물론이고, 시선이 가는 배우들이 많았다. 리해랑 역을 연기한 영빈은 아이돌 출신으로 이번 무대가 데뷔작이라고 한다. 처음인만큼 부담과 떨림이 어마어마했을텐데, 그 기색 하나 없이 소화해냈다. ‘능청스럽게’라는 말이 어울리는 연기였다. 남편은 배우 칭찬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먼저 나서서 입이 마르게 칭찬할 정도였다. 정말 리해랑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여유와 자유로워 보이는 외면과 달리 고독하며, 진중하고 깊은 내면을 연기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신인에게서 볼 수 없는 캐릭터 해석력과 표현력이었다.
리해진 역을 맡았던 민규 배우도 위대했다. 동일한 역을 다시 연기해서 그런지 캐릭터와 동화되어 보였다. 완전히 그 캐릭터에 푹 빠져서 연기하고 있는 게 나한테까지 느껴졌다. 리해진은 강인한 면과 순수하고 유약한 면이 빠르게 바뀌거나 겹칠 때가 많은 캐릭터였다. 이런 캐릭터는 해석과 연기가 어려운데,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5446 남파부대 총교관 역을 맡은 김수용 배우는 내공이 돋보이는 배우였다. 연기와 가창력에서 탄탄한 기초와 연륜이 드러났다. 단전에서부터 나오는 연기톤과 고음처리에서 넋을 잃고 봤었다. 극장에서 나와 바로 검색해 볼 정도로 그의 연기와 노래실력이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순임이 역을 맡은 최은경 배우는 평소 아나운서의 모습이 단번에 잊힐 정도로 완벽한 변신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TV를 보다가 예능프로그램에서 최은경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모습을 많이 봤었다. 그래서 갑자기 배우로 변신한 그녀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자연스러운 연기에 적응이 빨리 됐다. 억척스럽지만 따스하고, 유머와 러블리를 겸비한 그녀만의 스타일로 해석한 순임이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재탄생 됐다.
생중계나 다름 없는 뮤지컬 무대에서 1인 2역을 연기한다는 건 쉽지 않다. 서수혁과 조두석을 연기한 성재 배우는 그 어려운 연기를 매우 잘 해냈다. 극과 극의 캐릭터를 차별성 있으면서 이질감 없이 연기했다. 다른 캐릭터의 성재 배우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주인공 원류환 역을 연기했던 김찬호 배우는 주인공 답게 존재감이 강한 배우였으며, 실력도 위대했다. 영화에서 김수현 배우의 연기가 강렬했던 만큼, 아무리 잘 하는 배우여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기를 보는 순간, 김찬호 배우만의 원류환에 빠져버렸다. 가창력은 김수용 배우와의 듀엣에서도 밀리지 않는 실력이었다. 특히 모든 진실을 확인하고 울부짖는 신에서 진짜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한 연기는 잊을 수가 없다. 뭉크의 절규를 보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 나도 함께 무너졌다. 그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위대한 포인트 5. 은밀한 작품성과 메시지
1부에서는 코믹한 에피소드, 캐릭터 소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퍼포먼스가 중심이었고 2부는 깊어진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 작품성과 작가의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1부 말미에 등장한 빨래 신에서부터 없던 기대가 생겼다.
남편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 기대감이 올라갔지만, 난 반대였다.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이면 더 기대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대감이 제로였던 이유는 영화를 매우 가볍게 봤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남은 건 김수현 배우의 연기 뿐이었다. 그래서 눈길을 사로잡는 퍼포먼스를 보는데도 기대감이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빨래 신이 나오기 전까지.
넘버 ‘평범한 나라 평범한 집 평범한 나’가 등장하는 빨래 신에서 원류환의 임무인 이불 빨래를 리해진이 대신 해주고, 리해랑은 오디션 연습을 한다며 기타를 치며 노래한다. 그 사이에서 원류환은 임무도, 그리운 어머니도 모두 잊은 채 행복해 보였다. 동시에 저 귀한 청춘이 조직에 의해서, 누군가의 야망에 짓밟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위치에 충실한 줄만 알았던 인물이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 모습에서는 가슴이 미어졌다. 평범한 나라와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라는 대사는 그동안 평범한 삶에 대한 나의 신념을 되돌아보게 했다. 내가 바라던 평범한 삶은 진짜가 아니었다. 평범한 나라와 집안에서 태어나 나이에 맞게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진짜 평범한 삶이었다. 그런 평범한 삶을 나는 당연하고 쉽게 가진 바람에 갈증을 느끼고 내 삶을 불행히 여겼다. 이 뮤지컬을 보면서 쉽게 가진 그 삶이 누군가에겐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되새겼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평범한 삶이 아니라 이미 가지지 못한 것들 그리고 이상만을 바라보지 말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을 보기’였다.
평범한 삶과 청춘을 조직에게 빼앗겨 버린 원류환, 리해랑, 리해진은 끝까지 조직에 의해 희생당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주어진 역할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슬프고도 인상적이었다. 좌석배정이 좋았던 덕인지, 뮤지컬의 힘 덕인지 작품성이 뚜렷하게 보였다. 큰 틀은 흔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처절하게 슬프고 따스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순임이가 준 월급통장에 무너졌지만, 혁명전사로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던 원류환, 쿨 하게 살다 쿨하게 간다는 대사 그대로 오디션 합격문자를 받은 순간에도 미련 없이 희생을 선택한 리해랑,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까지 충성심을 잃지 않았던 리해진. 세 사람은 ‘나’답게 다른 선택을 하지만, 방향은 같았다. 작품성에 마침표를 찍는 결말이었다.
내 눈에는 그들이 책임감 때문에 마지막까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한 듯이 보였다. 풋풋함이 가시지 않은 청춘들이 강요된 책임감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억눌러야 했던 그 심정은 어땠을까.
촉이 왔다. 평범한 삶을 꿈꾼다는 말에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꽁꽁 숨겨놓았구나. 그들이 보낸 은밀한 메시지를 들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