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함께 보내던 사람이 오늘 누군가의 잘못된 짓으로 떠나버리고, 만날 수 없는 내일이 온다. 그렇게 구멍이 생긴 채로 내일의 내일이 쌓이고 또 쌓인다. 구멍에 구멍을 덧대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그냥 구멍이다. 그 무엇도 채울 수 없고 사라져 버린 시간 같은 것. 그 구멍을 <경주기행> 속 이별에서 봤다.
일상에서 한낱 아끼던 물건만 사라져도 '이별'이라는 단어가 붙을 수 있는 마당에 <경주기행>의 인물들은 사람을 잃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윤경주. 살인자에게 살해되어 다시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딸 그리고 동생. 그리고 이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살인자에게 복수를 하자고 한다.
# 절벽을 걷는 듯한 복수
사적 복수는 과연 정당한가?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주제였다. 나는 매번 누군가에게 '사적 복수를 할 수 있게 된다면 할'건지에 대해 물어본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참혹한 기사들과 사건들을 보다 보면 법의 한계(그 법이 있기에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끝을 볼 수 있는 것도 동의하면서도)는 분명히 존재한다. 경주의 가족들은 살인자와 합의했다. 미쳤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범인은 초범이라서, 우발적인 살인이라서,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서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고작 15년 형을 받은 이후였다. 이것을 통쾌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경주의 엄마 옥실은 범인이 합의한 대로 8년 형을 살고 나옴과 동시에 딸 장주, 영주, 동주와 함께 경주로 떠난다. 가족이 함께 여행 갈 때 쓰자던 차에 그 범인을 싣고 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여행은 아주 엉망진창이다. 셋째 딸 동주가 실수로 차의 창문을 깨는 것부터 갑자기 등장한 장주의 남편과 딸까지. 계획이 어긋날 때마다 드러나는 코믹한 부분이 웃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가슴의 응어리가 풀리는 사적 복수의 장면이 아니라 자꾸만 어긋나는 계획을 보여준 의도가 무엇일까?
이들의 복수는 사실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족이 계속해서 살인을 두고 엇갈리는 것에는 가족임에도 경주를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옥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슬픔이 가장 큰 사람이다. 장주는 경주와 사건이 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를 너무나도 불쌍해하지만 현실에 부딪혀 빨리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영주는 법대를 나와 이성적인 판단이 빠르게 되기에 가장 복수를 하고 싶어 하면서도 이 복수를 조금은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동주는 경주 대신 자신이 죽었으면 조금 나았을까, 하고 생각한다. 같은 사람을 잃었지만 복수를 대하는 태도는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영화를 보다보면 아픈 손가락과 덜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편함이 많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가 마치 가족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네 명이 생각하는 복수의 방식과 의미는 확연하게 달랐다. 하지만 각자에게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슬픔 하나만으로 이 사건에 부딪히는 것은 복수라기보다 이별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통해서 각자가 가진 구멍을 아주 조금씩 꿰맨 것이다.
# 코믹한 장면들 VS 후반부 10분
영화를 보면 웃긴 장면들이 꽤 나온다. 상황에 맞지 않는 개그들과 인물들 사이에서 나오는 어이없는 장면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영화의 후반부 10분과 대적한다. 옥실은 결국 살인자를 죽이는 것에 성공한다. 장주가 몰래 범인을 풀어주고, 영주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고, 동주가 도굴꾼으로 몰려 경찰서에 잡혔는데도 복수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마 이 후반부에 대해 의문과 불호를 보이는 사람이 꽤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결말이 인위적이라던가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는 참 슬프게 들릴 것 같다.
끔찍하고도 대단한 옥실의 방식은 아마 옥실이 생각해 온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었을 것이다. 딸인 장주, 영주, 동주가 복수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경주를 보내줄 때 엄마인 옥실에게 살인자를 잔인하게 죽이는 그 과정이 최고가 아니라 최선이었던 것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옥실은 경주가 수학여행을 떠나던 그날로 돌아간다.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릴 수도, 멀리 떠나버린 경주를 다시 붙잡을 수도 없다는 것을 옥실은 안다. 하지만 그 복수가 그나마 옥실을 커다란 불구덩이에서 꺼내준 것이다. 앞으로 그녀와 가족들의 삶이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옥실의 편안한 표정을 보면 슬픔과 행복과 아픔이 뒤섞인 곳에서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툭하면 울음이 터졌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부터 공감할 수 없는 부분까지 빼곡하게 채워진 그 마음을 보며 위태로운 복수의 과정을 함께 걸었다. 배우들의 연기력은 물론이거니와 여성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남겨진 여성의 선과 악에 대해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결과를 가늠할 수 없으면서도 떠났던 도전에 나의 슬픔도 함께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