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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완주했다. 지금은 없어진 셀 작화 특유의 감성과 세기말적 분위기, 독특한 연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아주 오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끌리게 만들었다.

 

워낙 유명한 시리즈이니만큼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고 보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에반게리온을 보는 순서는 이상하다. 오리지널 TVA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총 26화 중 24화까지만 보고 극장판인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본 다음 남은 25화와 26화를 보는 것이 정석 시청 루트다. 나는 도저히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 너무 궁금해서 이 조언을 무시하고 TVA 25화, 26화부터 먼저 봤는데, 괜히 조언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24화까지의 사건 전개를 무시하고 어떻게 됐는지 상황 설명이 전혀 없이 갑자기 등장인물들의 내면 세계를 설명하더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엔딩으로 마무리한다. 후에 찾아보니 일부러 이러한 혼돈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제작비와 시간 압박에 의한 어른의 사정이었다고 한다. 사실 유심히 보면 예산 부족을 정적인 연출로 극복하려고 한 시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극중 중요한 설정이 친절한 설명 없이 아무렇지 않게 언급되기 때문에 주의를 잘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어떤 비밀은 끝날 때까지 진짜로 무슨 의미인지 모른 채 베일에 싸여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후 검색을 통해 해석과 감독이 책을 통해서 밝힌 세부 설정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생동감 있는 액션을 중요시하는 요즘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에반게리온을 보면 초반 전개는 너무 잔잔해서 잠이 올 지경이었다. 매 화마다 한 개의 사도를 어찌저찌 처리하고 다시 일상을 맞이하는 모습이 평화롭게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극 후반부에 이를수록 급격하게 상황이 악화되고 인물들의 정신도 붕괴되어간다. 핀치에 몰리는 어린 파일럿들과 현실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심리 전개, 감각적인 연출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다음 화를 누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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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사소하게 느끼는 점은 여름에 보길 잘했다는 것이다. 에반게리온은 '세컨드 임팩트' 이후 일본에는 오직 여름만 존재하게 되었다는 설정이다. 혹시 이것도 어른의 사정일까. 무튼 몇 개월이 지나는 동안 등장 인물들은 수트를 제외하면 여름 옷차림이다. 심지어 교복도 하복 뿐이다. 또 워낙 고전 명작이기에 종종 출처를 몰랐던 유명한 클리셰들의 원조를 발견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낯선 천장이다."


다양한 점들이 매력적이었지만, 결정적으로 에반게리온을 명작 반열에 들게 만드는 요소는 극 후반부에 이르러서 밝혀지는 인간의 자아와 관계, 상처에 대한 비유였다.

 

극 중 사도와 에바(에반게리온)의 강력한 방어막으로만 설명되었던 'AT 필드'의 비밀이 드러난다. AT 필드는 평범한 인간에게도 모두 존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약하기에 외부의 폭력을 방어하지 못하며, 타인과 나를 구분짓고 고유의 형태를 만드는 역할만을 했다. 즉 AT 필드는 사람의 자아이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데 혼자 있는 게 싫은 거지?"

 

수없이 사람에게 상처받는 신지는 모든 사람이 싫다. 그렇다고 혼자가 되는 것도 싫다. 결말부에는 자아가 붕괴된 채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신지와 막을 수 없이 진행되는 '서드 임팩트', 모든 인류는 LCL 용액으로 바뀌어 뒤섞여 버린다. 너와 내가 존재하지 않아서 상처도 생길 수 없는 모두가 하나가 되는 세계. 이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밝은 선율과 대비되는 가사, 거부할 수 없이 다가오는 멸망은 거북한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러나 신지는 마지막 순간 결정을 번복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더라도, 개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인간으로 돌아온다. 부상을 당한 이미지로 자신을 심상화한 아스카와 함께.

 

여기서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엔딩과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엔딩의 방향성이 약간 갈린다. 이 두 개의 엔딩의 시점이 다소 모호하고, 동시에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할 지는 보는 사람의 자유. 일단 나는 좋게 해석하기로 했다. 이카리 유이 말마따나, 일단 살아가고자 하면 행복의 기회는 어디라도 있는 거니까 말이다.


구 에반게리온 시리즈는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으로 끝난다.

 

이후에 리부트 혹은 루프물 후속작인 신 에반게리온 서, 파, Q, 신극장판이 전개되었지만, 세세한 설정이 바뀌었기 때문에 보지 않기로 했다. 이미 오리지널의 엔딩으로 충분하다고 느꼈기도 하고. 하지만 관객들에게 충격을 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엔딩과 달리 확실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지은 시리즈의 결말과 ost 'one last kiss', 'beautiful world'만큼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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