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낯선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세대적 감각을 드러낸다”는 평을 받으며 제19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한 서윤후 시인의 새로운 시집이 출간되었다. 2021년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후 4년 만이다. 사랑보다 상처를 앞서 배운 소년의 복잡한 내면, 죽음을 앞둔 노인이 보낸 여름 해변에서의 자취, 일상과 관념을 오가며 선보인 묵직한 통찰, 슬픔과 공존하며 타인을 보살피는 다정을 그렸던 서윤후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은 어떤 내용을 담았을까.
시인의 말
돌아보지 않으려고
나는 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
첫 페이지, 시집의 서문을 여는 시인의 말. 서윤후 시인은 예민한 감수성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특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첨예한 감성과 마음을 후비는 문장력, 그 가운데 쓸쓸함과 고독을 세련되게 이야기하는 문체. 『나쁘게 눈부시기』가 서윤후 시인의 악몽이라면, 이 악몽은 깨어야 하는 것일까 품어야 하는 것일까. 이전엔 단 한 번도 ‘나쁘다’는 단어가 자신에게 없었다는 시인이 작정하고 나쁜 것을 고이고이 담은 소중한 악몽의 나열이었다.
안간힘의 무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선물을 스스로 가져본 적 있던 너는 바게트 사이로 포개어져 축축한 루콜라처럼 아직까지 초록인데, 오늘 치 안간힘인데,
「사프란」 中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선물은 모두에게 거절당한 무게. 그 무게를 스스로 떠안는 선택을 하는 사람은 꼿꼿할지언정 축축할 수밖에 없고, 한계치로 끌어다 쓴 안간힘. 거절당한 호의는 시들지 않고, 아직까지 초록으로 살아 있다. 그 초록을 생생하게 유지하는 것은 또 얼마나 끌어 쓴 힘일까. 관계에서 수취 받지 못한 마음은 폐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신인이 아닌 보낸 이를 더 짙고 깊게 적셔버린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올 때마다 내리치던 얼굴이 있었는데 우리는 겨우 그 얼굴을 하고서 살아가는 줄도 모르고
「견본 생활」 中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올 때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짓는가. 귀찮음, 당혹스러움, 약간의 불안함과 기대, 그리고 이내 언짢음과 일말의 경계를 가진 표정으로 받아내겠지. 모르는 번호를 어떠한 종류의 감정으로든 무시로 내리치며 살아가던, 그런 얼굴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았다. 일상 대부분의 표정이 무기력과 환멸로 점철되어 있는 스스로를 거울로 마주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겨우내 살아내고, 그럼에도 아등바등 살아내고, 마지못해 받는 인생을 열심히 떠받치며 살아내고…. “품위는 지켰지만 어딘가 일그러지는 얼굴을 헹구는 세수”(「그다지 슬프지 않은」)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겨운 일상이 떠올랐다. “맑은 물이 담긴 눈동자를 흘리지 않으려고, 찌푸린 얼굴로 땅속에 묶인 뿌리를 뒤척이면서”(「독화살개구리」)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을 찌푸리며 단단히 딛고 선 두 발만을 응시한 채 사력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언젠가의 인생이 모두에게 있었을 것이므로.
우는 얼굴이 원본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파본」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일까, 나쁜 이야기일까. 제본이나 인쇄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손된 책인 파본이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면 그것은 파본일까, 정본일까. “파쇄기가 파쇄기 속으로 들어가는 생각”(「고독지옥」)은 완벽히 깨부수는 파쇄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깨뜨려 부수는 파쇄를 역설적으로 부수어, 깨뜨리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삭제하던 기계가 스스로 삭제된다면, 파쇄는 목적을 상실한다. 여기서 서윤후 시인은 ‘삭제’가 곧 ‘시작’의 문을 연다는 역설을 제기한다. 나쁜 이야기를 다시 쓰려면, 우선 나쁜 이야기를 남김없이 갈아야 한다. 파쇄 이후의 잔해가 재료가 되기 때문이다.
망가지는 일에도 완성은 필요하지요
무릎은 내 절망의 접속사처럼 나를 딛게 만들고
「겟세마네」 中
망가져서 쓸모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도 완성이 필요한 것처럼, 절망의 접속사가 한 걸음을 더 내딛게 만드는 것이 인생인 것처럼. 자기 소멸은 끊임없이 자신을 해체하고, 분해하고, 그렇게 모든 것을 깨뜨려 부수고 나면.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처음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원본.
그리고 서윤후 시인은 우리의 “우는 얼굴이 원본”(「체크인」)이라고 못 박는다. 우리가 흔히 행복과 웃음만을 남기는 편집본이 아닌, 울음이 근원이라는 말. 감정을 증류한 결과물이 아니라, 증류 이전의 혼탁한 원액이 진짜 서사라는 주장. 맞는 말이다. 우리 모두 울음으로 탄생하지 않는가. 울음 자국을 그대로 품은 나쁜 이야기는 오히려, 그 나쁜 아픔과 상처를 딛고도 꿈꿀 수 있는 더 좋은 세상을 말할 수 있지 않는가.
계절처럼 밀려오는 사랑
뒤돌아본 여름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더 멀리 가라고 손짓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우리」 中
여긴 따뜻한 이야기가 망쳐버린 혹한이었지
아마도 거의 다 울어가던 겨울이었지
「귤 창고」 中
특히나 서윤후 시인의 시 중에는 계절감이 살아있는 시가 많다. 주로 여름이고, 시집의 맨 뒷부분에 겨울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여름에서 냉랭함을 이야기하고, 겨울에서 뜨거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너무 더울 때는 “차가운 구름 솜”(「비산화」)이 필요하고, 너무 추운 곳에서는 “그저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짓물러가는 향기로 대화를 이어나갈”(「귤 창고」) 것이 필요할 뿐이다.
계절은 어쩌면 시간적 배경이 아니라 감정의 증폭 장치다. “언젠가 시침질해 둔 여름”에 봉합된 여름의 열기는 어쩌면 너를 기억하기 위한 나의 발버둥. “사람은 녹아갈 때마다 넘어지곤” 하기에 꽁꽁 감싸둔 열기를 통해 “부축할 수 있을 정도로만 넘어지”며 얼음 같은 진실에 가까운 너를 버텨낸다. 그렇게 “나의 열기를 주고 너의 냉랭함을 받는다”며 마무리 되는 시 「비산화」를 나는 사랑으로 본다. 차가운 농담 같은 이름을 고이 견뎌내기 위해서는 여름을 시침질해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 사람이 죽기 위해선 몇 명이나 필요해요?
구해달라고 고백하는 사랑은 이미 끝난 게 아닐까요?
「고독지옥」 中
기억은 개인적 소유가 아니다. “떠나고 나서야 시끄러워지는” 누군가는, “우리가 없어도 계속 재생”(「아무도 없는 우리」)되는 기억의 플레이리스트이다. 누군가의 부재는 재생 버튼을 멈추지 못한다. 오히려 때가 되면 밀려오는 계절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적인 존재. 한 사람의 사랑이 죽기 위해선 몇 명이면 되는 걸까. 불가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억 속에서 구조를 바라는 사랑은 끝난 사랑일까, 영속하는 사랑일까.
찌푸리며 살아내고 나쁘게 사랑받기
끊어질 각오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은 어때?
「유리가미」 中
시인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받아적는 악몽. 받아적으면서 새겨지는 악몽, 그래서 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나쁜 것들. 그러나 나를 살리는 것들. 마음 한 번 굳게 먹고 나빠질 각오로 살아내는 것. 그러나 눈부시게 다시 태어나는 것. 그 순환과 상쇄의 작용을 하며 연명하는 삶.
서윤후 시인이 ‘우리’를 말하는 방식은 다정하다. “나를 한 번 더 사랑한 것들”은 “나를 한 번 더 죽이는 것들”(「그다지 슬프지 않은」)이 되어도, “산산조각 난 어제를 겨우 나눠 가지면서/서로의 깨진 자국을 맞대어보는 다정함”(「체크인」)으로 낫는 것마저 잊어버리는 따뜻함을 나눈다.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영영 잃어버리”(「망아와 유과」)는 기분으로 간직한 채, “영원히 날고 있는 비행접시”(「킨츠기 교실」)에서 함께 비행을 꿈꾼다.
함께 치워야 할 빛을 생각하다가
우리는 눈부심을
까마득하게 잊기도 했다
「블랙아웃」 中
빛은 밝은 매개체. 가장 좋고 눈이 부시는 것만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 눈부심에 우리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찌푸린 채 나쁨을 이야기하는 인생은 어쩌면 눈부신 인생. 나를 죽일 듯이 나쁘게 사랑하는 것들은 어쩌면 나를 한 번 더 소생시키는 사랑. 문장이 너무나 좋았던 시집이다. 다시 볼 때마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마음이, 삶이, 사랑이 늘 새롭게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