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한 번 잘못 꿰인 단추는 다음 단추마저 어긋나게 만들고, 굴러가기 시작한 눈덩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다 이내 나를 집어삼킬 것 같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만 같은 순간, 사람들은 하나의 질문을 되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연극 <플리백>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플리백(Fleabag)'은 영어권에서 오래전부터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곳'을 뜻하는 표현으로, 극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이름이 암시하듯 작품은 마치 쓰레기통에 처박힌 듯 엉망이 되어버린 한 사람의 삶을 조명한다.
한국 초연으로 선보이는 연극 <플리백>은 배우 단 한 명이 극을 이끌어가는 1인극이다. 무대 위에는 한 사람뿐이지만, 배우의 목소리와 표정, 시선만으로 수많은 인물과 공간이 생겨난다. 여기에 주인공이 수시로 객석을 향해 말을 거는 구조는 관객을 단순한 관람자에서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는 공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야기는 플리백이 친구 '부'와 함께 운영하던 기니피그 카페를 접게 될 위기에 놓이고, 새로운 일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면접 도중 갑작스럽게 윗옷을 들쳐 올리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일삼는 그녀의 모습은 당혹스럽고 다소 불편하기까지 하다. 과연 내가 이 인물에게 쉽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을까 싶다.
그럼에도 극 초반의 분위기는 꽤나 유쾌하다. 그녀의 말투는 능청스럽고,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녀가 객석을 향해 예상치 못한 수위의 농담을 던질 때면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1인극임에도 무대가 조금도 비어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배우는 대사와 몸짓만으로 주변 인물들을 생생하게 만들어내고, 관객은 어느새 그녀의 삶 한가운데로 끌려 들어간다.
과거의 이야기가 무르익을수록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진다. 플리백이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고, 그 이후에도 비슷한 선택을 반복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이제 더 이상 웃을 수가 없다. 친구 부에게 선물했던 기니피그 '힐러리'를 품에 안고 절규하듯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에서는 극장 안의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제야 처음에는 장난처럼 들렸던 농담들이 사실은 죄책감과 상실감을 견디기 위한 그녀의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필요로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혐오 때문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한 사람의 모순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진다.
90분 동안 플리백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녀가 왜 기니피그 카페를 열게 되었는지, 어떤 상실을 겪었고 어떤 선택들이 지금의 삶으로 이어졌는지를 조금씩 알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다시 처음의 면접장으로 돌아온다. 시작과 끝이 같은 수미상관 구조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행동을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묻는다. 자, 이제 플리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는 쉬이 답을 내릴 수가 없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쉽게 평가하고 판단했던 삶도, 그 안으로 들어가 연약한 속내를 마주하는 순간 함부로 결론 내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플리백의 삶을 따라가며 '그러니까 그러지 말았어야지'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연극 <플리백>은 실수와 후회로 점철된, 언뜻 기사회생조차 불가해 보이는 그녀의 삶 속에 작은 숨구멍 하나를 뚫어놓는다. 이대로 면접이 끝난 줄 알았건만, 다시 돌아온 면접장에서 면접관은 그녀에게 말한다.
"우리, 이 면접 다시 시작할까요?"
마치 그 한마디가 플리백에게, 그리고 어쩌면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들린다. 실수는 삶의 일부일 뿐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규정하지는 않는다고, 다시 시작할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그러고 보니 극 중 '연필 위에 지우개가 달린 이유는 실수를 지우기 위해서'라는 대사가 있었다. 만약 우리가 지우개 달린 연필로 태어나,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게 인생이라면 아마 내 삶에도 수없이 많은 실수와 오역들로 가득할 것이다. 중요한 건 실수를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필요할 때 다시 고쳐 쓰며 다음 문장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일임을.
그렇기에 연극이 끝나고도 이어질, 그녀가 앞으로 써 내려갈 그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