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을 가진 관객만이 찾을 수 있는 이야기가 준비돼 있습니다“
‘슬립 노 모어‘ 원작자 펠릭스 바렛 연출이 이 특별한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던지는 힌트이자 충고이다. ’슬립 노 모어‘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는 이머시브 공연이자 대사가 없는 넌버벌 공연이다. 전 세계에서 뉴욕과 상하이에서만 관람할 수 있던 유니크한 공연이 서울에 상륙했다.

긴 기다림 끝에 매키탄 호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모든 소지품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검은 커튼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두컴컴하고 긴 복도엔 저 멀리 보이는 불빛과 형체를 알 수 없는 앞사람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인다. 짙은 어둠 속에서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어떡하지? 호러 공포 체험처럼 누군가 벽에서 나오거나 내 발을 잡아끌면 어떡하지? 등의 생각들로 스스로 생각의 방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출구를 찾기 위해 벽을 짚은 손에 나의 모든 감각이 쏠린 채로 <슬립노모어>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건물 통째로 사용하는 무대 공간
2024년 9월, 충무로의 상징이었던 대한 극장이 폐업한 뒤 문화 예술공간으로 리모델링 되어 7층 건물 통째로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 관객들을 맞이하는 맨델리 공연장부터 한국에만 있는 히든 스페이스까지 층마다 다른 공간이 연출되어 있어 층을 이동할 때마다 다른 세계로 초대된 것 같다. 게다가 관객에게 자유성을 최대한 주기 위해 발길이 가는 곳곳, 각 층의 방마다 디테일한 미장센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한국 공연엔 전 세계에도 없는 특별한 5.5층을 만들어 선보였는데 일반 계단으로는 이동할 수 없으며 가히 가장 압도적인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관람을 앞둔 관객이라면 꼭 한번 찾아보시길 바란다.

당신의 시선이 가는 대로 완성되는 이야기
모든 공연은 관객이 의자에 앉으면서부터 시작해서 일어나면서 종료된다. 그러나 매키탄 호텔에선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처음 슬립노모어의 공연 방식을 전해 들었을 때 매우 혼란스러웠다. “극이 진행되고 있으면 그냥 들어가서 보면 된다고?” 실제로 필자가 공연을 소개해 준 친구에게 몇 번이고 물어본 말이다.
그럼 어떻게 이 공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매키탄 호텔 안에선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 번째, 극의 전체 진행은 총 세 번 반복되며, 종이 울릴 때마다 루프가 반복된다는 신호이다. 각 캐릭터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 특정 행동을 하니 미리 대비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특정 행동을 검색해서 가는 것도 방법이다. 또 이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으니, 미리 스토리를 알고 가는 것도 적극 추천한다.
두 번째, 당신의 발길과 시선이 닿는 대로 자유롭게 호텔 안을 누비길 바란다. 텅 빈 세트장을 봐도 좋고 강렬한 메인 캐릭터를 따라다녀도 좋으며 영화나 연극에선 단편적인 역할을 하던 조연들이나 엑스트라를 따라다녀도 좋다. 필자의 경우 가장 처음에는 메인 캐릭터인 ‘맥베스’ 역할 배우의 이야기를 따라 다녔으나 가장 메인 줄거리의 주인공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아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위치’ 캐릭터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조연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의 흐름이나 주인공에게 가려져 알 수 없었던 캐릭터들의 설정이나 감정 변화들이 다른 이야기의 상상력을 떠올릴 만큼 자극적이었다. 엑스트라 배우들을 쫓아가는 경우 상상할 수 없던 공간을 마주하거나, 퍼포머에게 간택당하여 비밀스러운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원 온 원’을 경험할 확률이 높아진다.
세 번째,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설령 ’맥베스’의 이야기를 알고 간다 해도 이 공연은 내가 보는 시선에 따라 극이 완성된다. 당신의 MBTI가 J로 끝난다면 공연을 보는 동안은 P의 마음으로 다니길 추천한다. 필자의 경우 조연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문득 5.5층의 숨겨진 공간이 궁금하여 혼자 공간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 몇몇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작은방을 만났고 그곳에서 처음 생각과는 완전이 다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캐릭터를 만났다. 그러자 마음의 의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면? 모든 걸 봤다고 생각했지만 못 본 게 또 있다면? 하면서 또다시 새로운 단서들을 찾기 위해 극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설령 쫓아다니던 캐릭터를 놓치게 되더라도 걱정하지 마시라, 당신에게 새로운 이야기가 또 펼쳐질 테니.
단 하나의 관객에서 극의 참여자로
평소 연극이나 뮤지컬 또는 영화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하더라도 슬립노모어에선 걱정 없다. 퍼포머들의 생생하다 못해 날뛰는 생명력이 당신을 과몰입러로 만들게 될 것이다. 그들은 관객과 눈을 마주치고 여유롭게 미소를 보내기도 하며, 격정적인 현대 무용으로 캐릭터의 심경을 표현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카메라라는 벽으로,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는 무대 공간이라는 벽을 사이에 두고 관객과 배우가 서로 선을 지키며 마치 2D 같은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이곳에선 모든 관계와 공간이 3D처럼 변형된다. 게다가 내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 퍼포머들의 작은 디테일들이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이야기를 다른 위치에서 보는 재미도 있다.
나의 시선에 따라 이야기나 캐릭터의 이미지가 달라지니 마치 자유도 높은 게임이나 옴니버스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신비하게도 관객이 모르는 사이에 함께 공간을 채우는 참여자로 활약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던컨왕을 따라다니던 관객이 던컨왕의 장례식 장면에 교회 안을 채운 사람들로 보이게 되는 순간이라던가, 연회장을 가득 채운 화려한 무도회의 손님으로 되는 순간 같은 것들이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매키탄 호텔 내에서는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극의 방해요소를 막기 위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게 되는데 모두가 똑같은 가면을 쓴 채 퍼포머를 보고 있는 그 자체가 기묘한 광경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호기심이 때론 욕망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죄악이 되기도 하는 것 같은 아이러니하고 강렬한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매키탄 호텔 안에 있는 캐스팅 보드에는 캐릭터와 퍼포머들의 이름이 매칭되어 있지 않다. 오직 당신의 시선과 상상력으로 극의 흐름을 유추해야 하는 ’불편한 공연‘이 과잉 해석이 난무하는 요즘 세상에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때문에 매키탄 호텔 내부에선 친구 혹은 연인의 손은 놓고 혼자 다니길 추천한다. 스스로 경험하기 전까지 그 누구의 말도, 시선도 믿지 않고 관람한 뒤 함께 한 사람들과 퍼즐을 맞추는 재미까지가 신비로운 이곳 매키탄 호텔의 슬립노모어 공연 시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