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나오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상하게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저 아이처럼 살고 싶다는 거였다. 행복하게 웃으면서 생일 케이크의 초를 불고, 간절하게 소원을 비는 저 아이. 처음 만난 어른과 친구가 되고 아무렇지 않게 생일을 축하받는 료토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비행기 티켓을 검색한 건 아니지만, 그 기분이 꽤 오래 남았다. 좋은 영화의 조건이 꼭 극적인 서사나 반전일 필요는 없다는 걸, 〈쇼타씨의 마지막 출장〉은 2시간 내내 조용히 증명한다.
뒤바뀐 봉투 두 개
줄거리는 단순하다. 한국으로 마지막 출장을 앞둔 일본인 CEO 쇼타와 헤어진 연인에게 편지를 전하러 홀로 일본 에노시마를 찾은 한국 청년 대성이 라멘집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쇼타의 사직서와 대성의 편지가 뒤바뀐다. 서로의 ‘못 다 한 말’을 대신 전해주기로 하면서 두 사람의 여정이 엇갈려 펼쳐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계획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인물들의 행동에 자꾸 브레이크가 걸렸다. 술김에 일을 저지르고, 우유부단하고, 고집만 세다. 생각 좀 하고 움직이면 안 되나 싶은 장면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그 즉흥성이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 영화는 ‘뒤바뀐 봉투’라는 설정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쓰지 않는다. 사직서와 편지는 각각 쇼타와 대성이 오랫동안 꺼내지 못한 마음의 덩어리다. 그것이 의도적으로 뒤바뀜으로써 두 사람은 자신이 직접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우회해서 건드리게 된다. 감독 이주형은 이 단순한 장치를 통해 감정의 대리 전달이 어떻게 본인의 감정을 해방시키는지를 보여주는데, 그 연출이 설명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다.
두 개의 여정, 하나의 감각
쇼타와 대성은 나이도, 국적도, 처한 상황도 다르다. 쇼타는 오래 쌓아온 것들—회사, 가족, 역할—이 조금씩 무너지는 중년의 남자다. 대성은 이제 막 뭔가를 잃고 그 의미를 찾아 헤매는 청년이다. 한 사람은 출장지에서 여행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여행지에서 출장을 한다. 목적지는 달라도 두 사람 모두 어딘가에 ‘전해지지 못한 마음’을 들고 이동 중이다.
영화는 이 두 여정을 억지로 교차시키거나 극적으로 충돌시키지 않는다. 그냥 나란히 둔다. 그 나란함 자체가 위로다. 쇼타가 한국의 하수처리장에서 물이 정화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설명도 없고 대사도 없다. 그런데 그 장면이 어떻게 된 일인지 오래 머릿속에 남는다. 더럽혀진 것이 다시 맑아질 수 있다는 것, 그게 공장 얘기인지 사람 얘기인지 영화는 굳이 말하지 않는다.
에노시마의 바다도 마찬가지다. 시원하고 넓은 화면은 대성의 감정을 대신 설명해 준다. 어떤 감정들은 언어보다 공간이 더 잘 담는다는 걸, 이 영화는 알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각 인물의 내면을 반영하는 거울로 기능한다는 점은 이 영화가 여행 영화의 문법을 꽤 세심하게 구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폭우 속의 소장과 어디서든 친구를 만드는 아이
영화는 닮고 싶은 인간상들을 데려온다. 그리고 그게 주인공들이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하나는 이준혁이 연기한 오루디 소장이다. 쇼타가 출장 기간 동안 머무는 하수처리장의 책임자인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묵묵한 인물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현장에 나가 쓰레기를 걷어내는 장면은 짧지만 오래 남는다. 화려한 대사도 감동적인 독백도 없다. 그냥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한다. 비가 오는 날에도 물은 정화되어야 하고, 쓰레기는 걷어내야 한다. 소장은 그걸 안다. 계획을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 이 캐릭터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졌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쇼타가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쇼타의 아들 료토다. 파워레인저라도 좋아할 것 같이 생긴 그 귀여운 얼굴의 아이. 부모의 이혼으로 아빠와 떨어져 사는 료토는 대성을 만나자마자 경계 없이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관계에 조건을 달지 않는다는 걸 료토는 몸으로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료토는 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고, 지금 그곳에 살고 있는 일본인 할머니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낯선 사람, 낯선 공간, 낯선 언어. 그 어떤 것도 료토에게는 장벽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모두를 초대해서 자신의 집에서 생일을 축하받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환하게 웃었던 순간이다.
료토는 서사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의 주제를 가장 선명하게 체현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것, 낯선 곳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료토는 대사 한 마디 없이 해낸다. 그 옆에서 대성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도 자연스럽다.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배운다.
느린 영화가 남기는 것들
2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관객에게는 지루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서두르지 않는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여백을 두고, 그 여백이 관객 각자의 것으로 채워지길 기다린다.
비평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많은 상업 영화들이 관객이 놓칠까봐 음악을 높이고 클로즈업을 남발하는 방식으로 감정을 지시하는 데 반해, 〈쇼타씨의 마지막 출장〉은 꽤 오랜 시간 인물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그 태도가 이 영화를 단순한 힐링 영화 이상으로 만든다. 관객이 영화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시간을 같이 살아가는 느낌에 가깝다.
한일 합작이라는 구조도 주목할 만하다. 언어가 다른 두 주인공이 소통하는 방식, 서로의 문화권을 여행하면서 낯섦과 친밀함을 동시에 경험하는 설정은 단순히 로케이션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다. 국적과 언어를 넘어 연결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주제와 형식을 동시에 구성한다. ‘심야식당’의 프로듀서 엔도 히토시가 참여한 것도 이 영화의 결이 어디서 왔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잔잔하고 소박하지만, 그 안에 단단한 무언가가 있는.
결국 해피엔딩이면 된 것이다, 라는 말에 대하여
즉흥과 계획, 출장과 여행, 중년과 청춘, 일본과 한국. 이 영화는 그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각자의 방식대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와 엇갈리고, 그 엇갈림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삶을 흔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술 마시고 홧김에 일을 저질러도, 결국 해피엔딩이면 된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계획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도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 건, 어쩌면 나도 잠시 계획을 내려놓고 싶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료토가 항상 앉아 있던 에노시마 해변 앞에서 쇼타와 아들이 서로를 힘껏 안는 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대사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 포옹 하나로 이 영화가 하려던 말이 전부 거기 담겼다. 멀어졌던 것들이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꼭 말로 설명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료토는 그런 아이다. 전에 살던 집을 찾아가 할머니와 친구가 되고 자기 집에서 생일파티를 열고 대성을 만나자마자 형처럼 따른다. 대성도 마찬가지다. 할머니 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얻어먹고 료토의 생일을 함께 챙기면서 편지를 전하러 온 여행이 어느새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걸 느낀다. 료토와 대성은 둘 다 뭔가를 잃은 사람들이다. 한 명은 아빠를, 한 명은 연인을. 그런데 그 둘이 만났을 때 영화는 가장 따뜻해진다. 잃은 것보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이 더 크게 느껴지는 순간들, 그게 료토와 대성이 함께 있을 때 생긴다.
어른이 된 우리가 잃어버린 건 그 능력인지도 모른다. 잘 될 거라고 의심 없이 믿는 것,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기다릴 수 있는 것. 소장은 폭우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지킨다. 쇼타는 사직서를 꺼내고, 대성은 편지를 보낸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속도로.
〈쇼타씨의 마지막 출장〉은 그런 영화다. 크게 흔들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그리고 보고 나면 조금,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