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립 노 모어》를 보고 나온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다시 보고 싶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했다. 공연 속 장면들이 한 손으로 모이지 않고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피투성이의 예언, 격렬하게 몸을 부딪치는 세 마녀, 복도를 따라 차례로 켜지는 조명, 연회장의 컷컷이 잘리는 시선, 전등을 휘돌리며 얼굴을 하나씩 비추는 카드 게임. 장면 하나하나는 분명히 봤는데, 그것들이 어떤 하나의 이야기로 온전히 모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 불완전함이 불쾌하기는커녕 더 보고 싶게 만들었다.
첫 관람에서 나는 어떻게든 ‘중심 이야기’를 찾아내려고 했다. 《맥베스》를 읽었으니 당연히 그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공연은 시작부터 기대를 배반했다. 누가 맥베스인지조차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처음 마주친 젊은 여자 둘과 남자 하나를 한동안 남매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왜 사람들을 유혹하고, 왜 맥베스를 끌어들이며, 왜 이렇게 강렬한 춤을 추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들이 세 마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의 나는 배우를 ‘따라간다’는 이 공연의 관람법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얼떨결에 따라다닌 세 마녀의 동선은 시각적인 쾌감이 강했다. 춤은 다른 인물들보다 훨씬 격렬했고, 신체적인 접촉과 유혹에는 노골적인 성적 긴장이 흘렀다. '두 번째 예언 장면'에서는 장면 자체의 시각적 자극도 있지만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하나의 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 때문에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을 떠올리기도 했다. 무언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몰래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첫날 두 번째 루프에서야 비로소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이야기의 중심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맥베스를 따라가자 그제야 익숙한 《맥베스》의 윤곽이 보였다. 덩컨의 죽음과 뱅코의 죽음, 죄책감과 욕망. 그러나 이것 역시 대사 없이 몸과 음악과 공간으로만 진행되었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내용을 눈앞의 장면에 끼워 맞추며 읽는 것에 가까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슬립 노 모어》를 특별한 방식으로 재구성한 《맥베스》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관람에서 생각을 바꿨다. 이번에는 애써 중심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이미 큰 줄기를 어느 정도 보았으니, 그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궁금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병원의 세탁실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간호사들을 따라가자 누군가는 땅을 파고, 누군가는 병원 안에서 불길한 행동을 했다. 한 인물이 죽은 듯 쓰러지고, 남은 간호사는 갑자기 아래층으로 달려가 맥베스 부부의 방을 정리하며 앞으로 벌어질 사건의 흔적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이제야 이야기가 연결되나 싶었던 순간, 그 인물은 다른 관객 한 명을 데리고 방 안으로 사라졌다. 내가 따라가던 이야기는 그대로 끊어졌다.
이후에는 더 심했다. 헤카테를 따라갔다가 놓치고, 낯선 여자가 여행가방을 들고 나타나 누군가의 사진을 내밀었으며, 목걸이가 사람들 사이를 이동했다. 제단사와 박제사처럼 보이는 인물들은 서로 기묘하게 대립했고, 제단사는 새의 두개골 처럼 보이는 무덤에서 뼛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레이디 맥더프가 떨어뜨린 곰인형을 주워 그 안에 뼈를 집어넣었다. 다른 곳에서는 레이디 맥더프가 죽고, 뱅코와 맥더프, 말콤이 긴장 속에서 카드게임을 벌였다. 첫 관람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았는데도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작품의 매력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첫 관람에서 나는 박제사를 지나쳤다. 그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맥베스를 찾아야 했으니까. 두 번째 관람에서는 그 박제사를 따라갔고, 그 순간부터 그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다. 곰인형에 뼈를 넣는 행동은 레이디 맥더프의 서사와 연결되고, 다른 인물과의 대립은 마을 전체에 깔린 오컬트적인 분위기를 드러냈다. 물론 맥베스와 비교한다면 이 주변부 인물들의 서사는 훨씬 짧고 때로는 설정과 이미지가 이야기보다 앞서기도 한다. 모든 인물이 독립된 장편서사의 주인공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그것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유는 이 세계가 놀라울 정도로 시계처럼 정확하고 논리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사건이 반복되고, 인물들은 정해진 시각에 서로 만나며, 한 사람이 남긴 물건을 다른 사람이 발견한다. 음악을 잘 듣다 보면 지금이 연회가 벌어질 시간인지, 두 번째 예언이 시작될 시간인지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다. 관객이 한 사람을 따라가는 동안 다른 층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정확한 타이밍에 진행된다. 내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세계가 멈추지 않는다.
이 정교함 때문에 《슬립 노 모어》는 거대한 대서사시처럼 느껴진다. 실제 들어간 이야기의 양이 무한해서라기보다, 내가 없는 곳에서도 무언가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는 감각 때문이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일부지만, 그 일부의 바깥에 더 큰 질서가 있다는 확신이 생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자유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을 포기할지를 선택하는 자유에 가깝다. 한 인물을 따라가면 다른 인물을 놓친다. 한 방에 들어가면 다른 층의 사건을 볼 수 없다. 가까이 다가가면 전체 구도를 잃고, 전체를 보려고 뒤로 물러서면 작품은 다시 관객을 좁은 복도와 방 안으로 끌어들인다. 누구를 주인공으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뿐 아니라 인물과의 심리적 거리까지 달라진다.
이 때문에 관객은 단순한 관찰자가 되기 어렵다. 흰 가면을 쓰고 타인의 침실과 살인, 욕망과 붕괴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경험은 노골적으로 관음증적이다. 오히려 가면 때문에 더 과감해진다. 얼굴을 숨긴 채 원하는 위치를 선택하고, 원하는 사람을 따라가며,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고 타인의 사적인 순간을 본다. 여러 명의 관객이 가면을 쓴 채 한 사람의 몸과 행동을 에워싸는 광경 자체도 묘하게 범죄적인 감각을 만든다.
그런데 작품은 그 안전한 위치마저 가끔 뒤집는다.
한 번은 배우가 나를 별도의 방으로 데려갔다. 가면을 벗기고 얼굴을 마주한 뒤, 내게 말했다.
“이 방을 보고 싶었잖아요.”
그 순간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말'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그때까지 배우들은 거의 몸과 이미지로만 존재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내 얼굴을 바라보고 평범한 인간의 언어로 말을 건넸다. 나는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익명의 관찰자였는데, 순간 무대 위로 끌려 올라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보는 사람에서 보이는 사람으로 위치가 바뀌었다.
돌이켜보면 이 대사는 《슬립 노 모어》의 핵심을 정확히 건드린다. 관객은 계속 보고 싶어 한다. 닫힌 문 안을 보고 싶고, 놓친 인물을 따라잡고 싶고, 다른 관객이 목격한 장면을 알고 싶다. 배우들은 그 욕망을 조금씩 충족시키면서도 결코 완전히 만족시키지 않는다. 가까이 오게 한 뒤 사라지고, 단서를 보여준 뒤 다른 층으로 뛰어가며, 하나의 원인을 보여주면서 결과를 다른 관객에게 맡겨버린다.
그러므로 《슬립 노 모어》가 만드는 것은 몰입(이머시브)만이 아니다. 이 작품은 관객들의 '이야기를 향한 욕망'을 만든다.
보통 이머시브 콘텐츠에서는 세계를 충분히 탐색한 끝에 그것을 이해하고 정복하는 쾌감이 중요하다. 그러나 《슬립 노 모어》에서는 이해가 계속 미뤄진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라면 금세 흥미를 잃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오히려 너무 정교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한 번만 더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준다.
그러나 그 이해는 끝내 완성되기 어렵다. 인물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한 행동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질투인지 공포인지, 춤과 표정과 맥락만으로 판단해야 한다. 캐릭터의 성격도 하나의 해석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같은 인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이 보인다. 모든 동선을 외운다 해도 그 행동의 의미까지 하나의 정답으로 모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계속 이해하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맥베스》에서 시작해 이 작품 전체를 움직이는 욕망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맥베스는 예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 번 심어진 가능성은 욕망의 씨앗이 되어 세계 전체를 흔든다. 《슬립 노 모어》의 관객도 마찬가지다. 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다음 장면을 보고 싶어진다. 한 관계를 알아냈기 때문에 다른 관계가 궁금해진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인물 관계를 검색하고, 놓친 장면을 되짚고,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제목처럼 이 세계에서 누구도 편하게 잠들지 못한다. 욕망과 죄책감, 질투와 집착을 품은 등장인물들도 그렇고, 그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알고 싶어 호텔 곳곳을 뛰어다니는 관객도 그렇다.
두 번의 관람이 끝난 뒤 나는 여전히 《슬립 노 모어》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처음보다 모르는 것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즐겁다. 이 작품이 내게 준 가장 낯선 경험은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만족이 아니라,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이해를 계속 욕망하게 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공연을 보면서 연극이 관객에게 세계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세계를 보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의 욕망까지 들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