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미술사 수업에서 감상문을 제출해야 했을 때 나는 “전시장에 있는 현대 미술작품에서 보다 미술관 건너편의 와플 집에서 더 큰 감동을 느낀 것 같다”고 적었다. 과장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즉각적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 얼핏 보기에는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는 작품은 내게 그리 반가운 대상이 아니었다. 긴 설명이 붙은 작품은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부담으로, 설명이 없는 작품은 그 빈 의미를 스스로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물론 감상문의 마지막에는 ‘이런 생각이 이내 바뀌었다’는 식의 결말을 덧붙여야 했지만, 작품은 한눈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무언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 속 철학 풍경』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러한 생각은 게으른 감상자의 변명처럼 느껴지곤 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사유하게 만드는 그림’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화가가 마련해 둔 관람자의 자리, 그 빈틈을 기꺼이 비집고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노골적이고 무표정한 얼굴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그림 속 꽃은 어떤 계절의 꽃일까’, '화가는 작품 어디에 나의 공간을 마련해 두었을까.' 하는 질문들이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찰나의 즐거움이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재현을 보여 주는 고전적 방식 이상으로, 아니 더 완벽한 방식으로 재현을 구사하고 있다. 보여지는 것, 말해지는 것 이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재현의 방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여정은 푸코의 『말과 사물』을 열었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로 시작한다. 화가가 캔버스 앞에 서 있고, 공주와 시녀들, 난쟁이와 개, 어렴풋한 거울 속 국왕 부부가 한 공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림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 관람자는 붓을 들고 있는 화가가 지금 붓질을 하는 중인지, 시작하려는 건지, 혹은 마친 상태인지 특정할 수 없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처럼 모호하게 남겨진 문제에 관람자를 개입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치가 바로 ‘화가의 시선’이다. 화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캔버스 밖이다. 화가는 지금 캔버스 밖에서 자신을 바라볼 관람자를 건너다보고 있다. 관람자가 화가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그는 그림 속 시간 속에 서게 되고 그 사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즉각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주의를 기울일 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 인물들의 자리 배치, 시선, 표정 등에 나름의 해석을 부여하며 그림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보이지 않는 관념들이 포착되고 힘을 얻는다. 이 그림 속에서 가장 작은 자리를 차지하는, 정확한 형상조차 부여받지 못한 국왕 부부에게서 위상, 권력, 절대성과 같은 관념들을 이끌어 내는 것도 이러한 관람자의 사유 과정이다.
말하자면 벨라스케스는 감상자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구도로 설계되어 있는 그림 속으로 관람자를 초대하며, 관람자의 사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관념을 보다 완전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재현의 완전성은 캔버스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의 사유로 그 빈틈이 메워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주어진다.
지시하는 대상을 설명하는 텍스트와 조형적 재현 사이에 상호적으로 종속되는 재현의 관계가 있다. 즉 우리는 조형적 이미지와 텍스트 두 가지를 하나의 그림 혹은 하나의 이미지로 구현할 때, 그것들 사이의 필연적 연쇄 고리를 찾으려 노력한다.
전형적인 파이프 형상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적힌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은 관람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눈앞에 놓인 것은 분명 파이프인데 언어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람자는 이미지와 문장 사이에서 무엇이 어긋났는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수많은 질문과 부딪히게 된다.
푸코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 틈이다. 이미지와 언어가 온전히 합치되지 못하고 벌어진 틈에서 비로소 철학이 시작된다. 언어적 텍스트는 그림을 설명하고 그림은 그 문장을 구체화한다는 믿음에서 추방되어 ‘낯설게 사유'하기 시작할 때, 관람자는 단순한 관찰자에서 작품의 참여자로 탈바꿈한다.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틈새에 서서 단순한 형상이나 지시문으로 확인할 수 없는 더 복잡한 문제들을 향해 분투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마그리트가 마련한 매력적인 사유의 장이다.
마네는 자기 그림을 살필 관람자의 공간을 캔버스 밖에 마련해 캔버스를 열어 둔 채로 공간을 연장한다. 그러니 우리는 그 공간을 찾고 찾아 마네의 이야기와 만나면 될 일이다.
마네의 그림에서는 이상할 만큼 많은 것이 화면 밖에 남겨져 있다. 그는 공간을 분할하고 캔버스의 일부를 과감하게 생략함으로써, 우리가 너무도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회화의 질서를 조금씩 비껴간다. 인물들의 표정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인물들의 시선은 교차하는 듯하면서도, 그 시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재현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시선의 바깥에는 분명 어떤 장면이 존재할 텐데, 마네는 바로 그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그 자리를 비워둔다.
저자는 이처럼 생략된 공간이 있기에 오히려 화면 밖의 세계가 관람자의 사유 속에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바라보는 주체의 개입을 통해 비어 있던 공간 안에 전혀 다른 시간과 장면이 생겨난다. 푸코는 바로 마네의 이러한 공간에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발견한다. 현재의 순간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순간이 뒤섞이기도 하며, 기존의 질서가 너무 당연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떠오르고 충돌하고 변화하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마네가 열어둔 빈 공간은 문득 내가 지나온 삶 속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묻게 한다. 불안한 상태의 공간이지만 결코 그 불안은 부정적이지 않은, 일상을 해체하면서도 다시 일상을 강화하는, 비밀스럽고 낯선 공간 그런 곳은 어디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곳에서 어떤 낯선 가능성을 마주하게 될지 기대해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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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벨라스케스, 마그리트, 마네의 그림을 닮았다. 그림들이 우리를 빈틈으로 초대해 사유의 공간을 내어준 것처럼, 이 책 역시 독자가 거닐 수 있는 철학적 여백을 마련해 둔다. 그 여백 속에서 자꾸만 질문하게 된다. 만약 우리 삶 자체를 하나의 캔버스에 그린다면, 우리는 어떤 공간을 그려 넣을 것이며 그곳엔 어떤 시선들이 교차하게 될까. 그리고 무슨 의미들로 채워질 것인가.
작가는 푸코의 철학적 조각들을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으로 뛰어들며 감상의 지평을 넓혔듯, 우리 삶의 모든 순간 역시 그렇게 대해 보라고 말이다. 화가가 만들어 둔 미로 같은 공간에서 분투했던 것처럼, 이제는 진짜 현실이라는 이름의 캔버스를 마주하고 사유할 채비를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