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울려 퍼진 바흐의 'b단조 미사'는 관객들에게 깊고 고요한 영적 체험을 선사했다.
총 27개 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미사곡은 고음악의 거장 ‘필리프 헤레베허’와 세계적 바로크 앙상블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에 의해 19년 만에 한국 무대에서 연주되었다. 관객들은 ‘키리에(Kyrie)’로 시작해 ‘아뉴스 데이(Agnus Dei)’로 막을 내리기까지, 그들이 빚어낸 숭고한 흐름 속에서 하나의 존재론적 여정을 함께 걸었다.
이번 무대는 헤레베허의 오랜 음악적 탐구가 도달한 정점이었다. “음악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불필요한 것을 걷어낸다”는 그의 신념처럼, 과장 없는 해석과 절제된 표현 위에서 음악은 본질적인 힘을 드러냈다.
시대악기로 구성된 한 오케스트라, 5성부에서 8성부에 이르는 대규모 합창단, 그리고 루이제 베르네부르크, 예린 미라, 알렉스 포터, 카이 커팅, 요하네스 캄러 다섯 명의 솔리스트가 함께 만들어낸 사운드에서 관객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바흐 음악이 가진 종교적 신앙심, 인간적 고뇌와 희망 그리고 심오한 예술 세계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음악적 유언으로 남겨진 걸작
바흐의 b단조 미사는 그가 생애 후반 약 35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루터교 전례에서는 보통 ‘키리에’와 ‘글로리아’만 사용되었지만, 바흐는 ‘크레도’, ‘상투스’, ‘아뉴스 데이’까지 아우르는 전체 미사 구조를 집요할 만큼 집착해 완성했다. 구체적인 작곡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만년 시력의 악화 속에서도 직접 필사하며 작품에 생애 전반의 작곡 기법과 예술적 성찰을 집대성한 점에서, 이 곡을 ‘음악적 유언’으로 남기고자 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그는 이 곡의 거대한 구성을 통해 음악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인간 드라마, 신학적 의미, 수학적 질서까지 아우르고자 했다. 특히 기독교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숫자로 여긴 숫자 3을 활용해 총 27(3x3x3) 개의 악장과 3부 형식의 ‘키리에’를 구성하는 등 수학적·신학적 상징을 교차시키며, 음악과 신앙의 만남을 심오한 예술로 담아냈다. 이 곡은 바흐 생전 연주되지 못했으나, 1859년 라이프치히 바흐 협회에 의해 초연된 이후 종교 음악사 최고의 걸작으로 자리 잡았다.
I. Missa (미사), Kyrie (키리에)
공연은 ‘Kyrie eleison’의 장대한 푸가로 시작했다. 다섯 성부가 신의 자비를 반복해 호소하는 울림 속에는 신앙적 절실함과 바로크적인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이어진 ‘Christe eleison’에서는 소프라노 마리 루이제 베르네부르크와 예린 미라의 이중창이 현악 오블리가토와 어우러져 경쾌하고 평화롭게 흐르며 앞선 곡과 대조를 이루었다. 세 번째 곡 ‘Kyrie eleison’은 다시 장엄한 합창으로 돌아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삼부 형식으로 ‘Kyrie’ 파트를 완성했다.
I. Missa (미사), Gloria (글로리아)
‘Gloria in excelsis(하늘의 영광)’는 트럼펫과 팀파니의 힘찬 서두로 시작해 장조의 밝은 색채로 찬양의 기쁨을 그려냈다. 바로크 춤곡 느낌의 리듬감, 하늘에 닿을 듯한 목소리는 ‘영광’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그러나 ‘Et in terra pax(땅에는 평화)’에 진입하면서 분위기는 부드럽게 가라앉아 낮은 음역대의 선율이 신과 인간, 하늘과 땅의 연결을 잔잔히 표현해 냈다.
중심 악장인 ‘Domine Deus(유일한 주님)’에서는 플루트와 현악 위에 소프라노와 테너의 이중창이 얹히며 섬세한 선율을 펼쳤고, 곧바로 단조로 전환된 ‘Qui tollis peccata mundi(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은 앞선 곡과 대조를 이루며 깊은 비탄의 정서를 전했다.
각 악장이 이렇게 뚜렷한 대조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크 콘체르타토 양식의 특징으로, 헤레베허는 이를 극대화해 각 악장이 개성과 다채로움을 구현했다. 이어지는 ‘Qui sedes ad dexteram Patris’는 헤레베허가 가장 애정하는 곡으로, 알토 아리아의 내밀한 기도와 같은 울림이 오보에 선율과 어우러져 깊은 인상을 남겼다.
II. Symbolum Nicenum (니케아 신경)
니케아 신경을 바탕으로 한 9개 악장은 성육신, 십자가, 부활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음악으로 구현했다. ‘Et incarnatus est(육신을 입으시고)’는 하강하는 현악의 선율로 성육신을 묘사했고, ‘Crucifixus’(십자가에 못박히시고)는 단조의 반복적 하행하는 선율로 십자가 형벌의 무게와 그리스도의 고난을 형상화했다.
이어지는 ‘Et resurrexit(부활하시고)’는 모든 오케스트라가 참여해 상행하는 선율을 그리면서 팀파니의 울림과 함께 폭발적인 기쁨을 그려내며 부활의 환희를 전했다.
III. Sanctus (상투스)
성탄절을 위해 쓰인 ‘Sanctus’는 여섯 성부가 어우러진 웅장한 합창으로 힘차게 문을 열었다. 심장을 울리는 팀파니 소리와 함께 반복되는 ‘Sanctus’는 축제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신에 가장 가깝게 여겨지는 숫자 '3'을 활용한 세 대의 트럼펫과 오보에, 현악기의 구성 그리고 3박자 리듬의 베이스 선율은 바흐 특유의 수학적이면서도 심오한 예술 세계를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IV. Osanna (호산나)
‘Osanna(오산나)'는 여덟 성부가 어우러진 이중 합창으로 시작해, 마치 하늘을 향해 환희가 치솟는 듯한 벅찬 울림을 전개했다. 이어진 ‘Benedictus(복되시도다)’에서는 테너 가이 커팅의 맑고 깊은 음성이 플루트 오블리가토와 섬세하게 어우러지며 명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Agnus Dei(하나님의 어린양)’에서는 알토 아리아와 현악 오블리가토가 교차하며 가장 내밀한 기도의 순간이 펼쳐졌다. 안드레아스 숄의 해석으로 여러 차례 들어온 곡이지만, 이날 무대에 선 알렉스 포터는 한층 간절하고 밀도 있는 소리로 하늘을 향한 탄식을 노래하며, 신 앞에 선 인간의 마지막 신앙 고백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 곡 'Dona nobis pacem’은 ‘Gloria’ 파트의’ Gratias agimus’ 선율을 다시 불러와 반복하고, 그 위에 겹겹이 쌓이는 합창으로 장엄한 울림을 이끌어냈다. 평화를 간구하는 목소리로 바흐의 b단조 미사는 경건하면서도 숭고한 순간 속에 막을 내렸다.
음악이 남긴 믿음
음악을 통해 영적 소통의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필리프 헤레베허는 이번 무대에서도 '바흐 b단조 미사'가 담고 있는 진실한 소리를 구현하며, 관객들에게 그 안에 깃든 ‘영적인 힘’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 힘은 단순히 음악 속 종교적 텍스트나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헤레베허의 해석에 의해 더욱 선명히 드러난, 음악을 지탱하는 수학적 엄밀성과 규칙, 질서와 조화 같은 요소에서 비롯된 힘이었다.
공연에서 그는 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다듬어내며, 마치’ b단조 미사’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장인과도 같았다. 그렇게 완성된 '바흐 b단조 미사'의 장엄한 구조 안에서 관객은 음악이 품고 있는 조화와 질서 그리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질서’에 대해, 더 나아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우주적인 질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불가해한 힘 앞에서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삶이 단지 허무로만 흐르지 않으리라는 믿음이었다.
헤레베허가 말한 “순수한 소리를 통해 영적 소통에 이르는 일"은 결코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었다. 이번 공연은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고 , 나는 다시 한번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