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나와 동일한 사람이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나는 언젠가 또 다른 내가 지구 어딘가에 존재할지 모른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보게 된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UDmUzmXg0_pzT79RxUsFlQfA03dBK4pHvOKfDZVjK6MpFMWTUFj2D7yXXqrxn34RhGqoynLTPi6HYgM-8Ngiho8G2OWwGzoimJ8ZSQPGas57OnIpvO2CBuP55VJjgz10vTWmvxkkZ48vlqZmZouzVg-2 복사본.jpg

출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서로 닮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베로니카와 베로니끄. 폴란드에서 태어난 베로니카는 우연한 기회에 콘서트 독창자로 발탁된다. 공연 리허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광장에서 자신과 생김새가 똑같은 한 여자(베로니끄)를 목격한다. 이후 그녀는 갑작스러운 심장 통증을 느끼고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숨을 거둔다.


같은 시간, 프랑스에서 태어난 베로니끄는 베로니카의 죽음과 동시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눈물을 흘린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학교를 방문한 인형사 알렉상드르의 인형극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과거 자신이 폴란드 여행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 베로니카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veronique012.jpeg

출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감독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제목이 주는 인상에서 B급영화라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La double vie’는 이중생활이 아닌 ‘두개의 삶’으로 해석되는 편이 적절해 보인다. 이 영화는 매우 닮은 두 개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는 이 작품에서 매우 닮은 삶을 살고 있는 두 인물, 베로니카와 베로니끄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기법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화면에 담기는 대상의 크기, 카메라의 움직임, 앵글의 변화 그리고 내재음과 외재음의 조화 등 감독의 치밀한 설계에 주목하며 감상할 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빈번하게 사용되는 녹색 빛과 비장한 배경 음악 그리고 등장인물의 죽음에서 약간의 암울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는 감독의 철저한 계획 아래 놓인 장면들이 인물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루는 하나의 데칼코마니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를 보면서 흥미롭게 느낀 촬영 기법과 인상적인 장면들을 중심으로, 나름대로 느낀 바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반복적인 클로즈업


 

이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클로즈업의 사용이다. 영화의 처음, 감독은 어린 베로니끄의 거울에 비친 눈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이 확대된 눈 이미지는 공연을 앞두고 반지로 눈 아래를 문지르는 베로니카의 눈과, 호텔 침대에 누워 반지로 눈 아래를 문지르는 베로니끄의 눈으로 연결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보여지는 '클로즈업된 눈'은 두 인물의 불안을 해소하는 공통적인 습관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두 인물이 다른 시공간에서도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veronique029.jpeg

출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눈 다음으로 유리구슬과 유리구슬에 비친 풍경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클로즈업되는 것이다. 언덕 위에 모여 있는 붉은 지붕의 집들과 그 옆 비탈길 그리고 높은 교회가 있는 단순한 풍경은 반복적인 클로즈업을 통해 베로니카와 베로니끄 두 인물을 연결해 주는 영적 세계의 이미지가 된다. 베로니카의 아버지의 그림이면서 동시에 기차를 타고 가는 베로니카의 창 밖 풍경이 되고, 베로니끄의 꿈속 이미지가 되는 이 풍경은 하나의 세계, 세계의 전체처럼 다가온다.

 

 

veronique011.jpg

출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인물의 시점


 

영화가 그려내는 것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것은 감독이 베로카와 베로니끄의 시선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허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렴풋하게 느끼던 또 다른 자신인 베로니끄의 존재를 확인하고 집으로 달려가는 베로니카의 시선은 hand-held 방식(카메라를 손에 들고 촬영하는 방식)으로 촬영되어 위태롭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발걸음에 따라 흔들리고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느낌과 그녀의 불안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곧이어 그녀가 심장을 부여잡고 몸을 기울일 때에는 카메라가 함께 기울어져 oblique angle(기울어진 화면)이 되어 그녀에게 점점 다가오는 바바리맨을 비춘다. 이 순간, 그녀가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의 시선은 곧 나의 시선이 된다.

 

  

veronique022.jpeg

출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감독은 인물의 내면 심리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함께하도록 한다. 베로니카의 눈앞으로 지휘자와 합창단원들, 오케스트라 그리고 악마의 얼굴을 한 여성이 보이고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던 그녀는 곧 쓰러진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무대 위로 떨어져 기우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는 그녀의 마지막 시선을 보여준다. 이 시선이 특징적인 것은 그녀의 죽음 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 직후 카메라는 마치 영혼이 몸을 벗어나 날아가듯 그녀가 죽은 곳에서부터 사람들의 머리 위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잠깐의 암흑 후에, 관 위로 흙을 덮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춘다. 죽음 후에도 지속되는 이 ‘영혼의 눈’은 현실과 영화의 경계, 육적 차원과 영적 차원의 경계를 허무는 감독의 고유하고 독특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veronique031.jpeg

출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소리의 활용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영상뿐만이 아니다. 감독은 음악을 통해서도 그 경계를 허물고 있다. 영화 초반, 꿈에서 깬 베로니카가 아버지의 방으로 걸어갈 때 영화에서는 되풀이되는 테마곡이 어렴풋이 흘러나온다. (나는 처음에 이 음악이 영화 외부에 있는 배경음악이라 생각했지만 아버지에게 ‘뭘 듣고 계신 건가요?’라고 묻는 베로니카의 말에서 이 음악이 그들이 듣고 있는 영화 속 음악이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곧 장면이 전환되고 이때부터 음악은 인물들이 듣지 못하는 배경음악으로 바뀐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내재음과 외재음을 넘나드는 소리의 효과를 통해 현실과 환상, 영화 속 세계가 하나 되는 순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veronique018.jpeg

출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감독은 베로니카가 베로니끄를 목격하는 핵심 장면에서도 음향의 조절을 통해 이 영화의 주제를 전달한다. 베로니카가 또 다른 자신인 베로니끄를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에서 걷고 있는 베로니카의 구두소리가 들린다. 이 소리가 시위를 하는 사람들의 소음에 묻히지 않고 크게 들리는 것으로 보아 베로니카 자신에게 들리는 소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곧이어 먼 곳에서 베로니끄가 버스에 타며 버스 밖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장면의 시점은 사진을 찍기 위해 셔터를 누르는 베로니끄의 모습을 바라보는 베로니카의 것이지만, 소음에 묻히지 않는 카메라 셔터소리 즉, 베로니끄가 듣는 소리가 동시에 흘러나온다. 이 순간, 우리는 베로니카의 눈과 베로니끄의 귀가 동시에 존재하는 지점(아마도 그들을 연결하는 세계)에 도달하고, 각자 다른 공간에 있는 두 사람이 결국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감독이 사용한 대상의 클로즈업, 인물 시점의 촬영, 음향의 조절은 두 인물이 연결된 하나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 세계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베로니카가 말한 '혼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과 그녀가 죽은 후 베로니끄가 느끼는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은 이러한 연출 기법을 통해 더욱 깊이 전달된다. 그리하여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또 다른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화 속 다큐멘터리적인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안에 자신을 투영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대상을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빠졌던 때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밝혀내려고 시도했던 때를 떠올린다. 누군가는 그것을 이데아의 세계로, 소울메이트로 누군가는 떨어져나온 어머니의 자궁으로도 설명하지만, 감독은 그 답을 '또 다른 자신'으로 답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모든 질문을 멈추고,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또 다른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 영화를 계속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