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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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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사막이나 모래 이미지를 동경해 왔다. 그 건조함과 불모성 그리고 유동성의 특징을 모두 한 번에 지니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어쩐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더욱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모래의 이미지가 내 의식 너머에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대한 환상이, 모래에 대한 그리움이, 모래에 대한 동경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모래에 대한 마음은 늘 이렇게 막연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이었는데, 최근에는 나와 비슷한 동경과 집착을 품고 있었던 듯한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일본의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아베 코보(安部公房)'다. 아베 코보는 1962년 발표한 소설 『모래의 여자』 에서 모래를 통해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마음속으로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를 그리면서 그는 간혹 자기 자신이 유동을 시작한 듯한 착각에 빠지는 일도 있었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p. 20

 

 

『모래의 여자』는 한 남자의 실종을 알리며 시작한다. 며칠 간의 휴가를 이용해 곤충채집에 나선 남자는 언젠가 보았던 희귀한 곤충을 채집하기 위해 모래로 뒤덮인 땅을 찾았다. 그가 찾고 있는 ‘좀길앞잡이’는 파리목의 한 종류로 모든 생명이 죽어 사라지는 모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이 놀라운 적응력을 가진 곤충을 발견해 그것의 이름을 빌려서 나마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


하지만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남자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질 위기에 처한다. 사구를 따라 점차 해안으로 이동하던 남자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고 노인의 소개로 모래 구덩이 속 집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한다. 그러나 다음 날, 모래 구덩이의 바깥으로 이어지는 새끼줄사다리가 사라졌음을 알아차린 그는 자신이 노인의 계략에 빠져 모래 구덩이에 갇혔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래 마을의 사람들은 바람에 의해 끊임없이 흐르는 모래가 집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매일 모래를 퍼내며 살아가고 있었고, ‘모래 퍼내기’라는 반복된 행동을 통해 유지되고 있는 마을에서 남자 역시 모래를 퍼내는 기계와 같은 하나의 노동력으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소름 끼치도록 완벽한 반복 ······. 그것이 심장의 고동처럼 생존에 불가결한 반복이라 할지라도, 심장의 고동만이 생존의 모든 것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p. 166

 

 

학교 교사인 남자는 도시에서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잿빛 일상’을 살아가며 종종 자신의 삶을 ‘과자 틀’과 같다고 생각해 왔다. 그는 윤곽만 있을 뿐 알맹이가 없는 그 공허한 일상, 완벽하게 복제된 듯한 삶의 반복과 무의미로부터 잠시나마 탈출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반복해서 모래를 퍼내야 하는 모래 구덩이 속으로, 말하자면 ‘완전한 반복의 굴레’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남자가 매일 밤 부삽으로 모래를 퍼내면, 마을 사람들은 삼태기를 끌고 와서 모래를 운반하고 노동의 대가로 물과 식량을 보급한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 무의미한 노동은 얼핏 보면 부조리하게 느껴지지만, 그 이면에는 존재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근원적인 욕망, 바로 생존이 자리하고 있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래의 법칙에 순응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늘 다른 일을 꿈꾸면서 몸을 던지는 여전한 반복, 즉 먹는 것, 걷는 것, 자는 것, 노동, 성교를 반복하는 인간 삶의 은유처럼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모래 입자''로 표현하는 남자는 실은 모래 구덩이에 빠지기 전부터 이미 '모래 구덩이' 속에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 그래, 걷는 거야 ······ 그냥 걸어 다니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당신도 마음대로 나다녔을 것 아니야?

 

여자: 하지만 볼일도 없는데 나다녀 봐야, 피로하기만 할 뿐이니까요 ······. 정말이지, 끔찍하도록 걸었어요 ······ 이곳에 올 때까지 ······ 애를 안고, 오래오래 ······ 이제, 걷는 데는 지쳤어요 ······.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p. 85

 

 

하지만 모래 구덩이 속에는 한 여자가 살고 있다. 그녀는 새끼줄사다리를 통해 모래 구덩이 밖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음에도 매일 모래와 싸우며 모래 세계의 법칙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여자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는 '모래 세계에 여자를 붙잡아 두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을 품는다. 모래와 같이 유동하는 삶, 세계의 끝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유'로 여기는 남자는 그녀의 생활 방식을 혐오하면서 동시에 동정한다.

 

그러나 여자에게 자유란 더 이상 이동의 가능성이 아니라, 정착할 수 있는 장소와 삶의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동성에 가깝다. 모래 속에서의 현실을 자신의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여자는 그래서 언제나 외부를 꿈꾸는 남자보다 더 자유롭다. 여자는 마치 '영원한 무의미와 반복 속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겠느냐'는 니체의 물음에 긍정하듯 모래의 법칙에 순응하며 매일 밤 부단히 모래를 퍼낸다.

 

 

어느 날 남자는 까마귀를 잡기 잡으려고 뒤편 공터에다 덫을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희망'이라 이름 짓기로 했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p. 197

 

 

남자는 몇 차례에 걸쳐 지상으로 탈출하기 위한 시도를 한다. 여자의 죽은 남편의 허리띠에 셔츠를 연결한 긴 로프로 탈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어 보자며 마을사람들을 설득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계획이 실패하자 그는 마지막 탈출 수단으로 까마귀의 다리에 구조 편지를 매달아 보려는 생각을 한다. 그는 땅을 파내서 작은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까마귀 덫을 설치하면서 그것을 '희망'이라 이름 지었다.

 

그러나 며칠 뒤, 남자가 까마귀 덫의 뚜껑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까마귀 대신 적은 양의 물이 고여있었다. 우연하게도 '희망'은 모래 사구의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유수장치'가 되었고 이 새로운 발견을 통해 남자는 모래와 지형, 날씨를 연구하며 하루를 보내게 된다. 한편 여자는 '거울'과 '라디오'를 사기 위해 더욱 부지런히 모래를 퍼내고, 시간이 흘러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의 임신은 남자에게 탈출의 기회가 된다. 어느 날, 하혈을 하는 여자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모래 구멍 속으로 새끼줄사다리를 내려두었고 남자는 사다리를 통해 모래 구멍 밖으로 올라간다. 그토록 바라던 탈출의 순간, 남자는 모래 구덩이 바깥의 세계를 바라보며 여자와 유수장치 그리고 모래 세계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곧 어떤 결심을 한 듯 다시 모래 구멍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렇게 하여 아무도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칠 년이 지나, 민법 제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 아베 코보, 『모래의 여자』, p. 11

 

 

남자가 왜 모래 구덩이에 남아 살아가기로 했는지에 대해 해석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기에, 나는 이 결말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남자는 왜 탈출하려고 할 때마다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던 걸까. 어쩌면 '모래의 여자'라는 책의 제목이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 아베 코보는 소설 속 모래 구덩이가 인간 삶의 응축된 상징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래 구덩이는 남자가 도망쳐온 모래 구덩이 바깥의 세상,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세계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진정한 자유는 공간이나 이동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형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삶의 방식'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통해 모래 구덩이 속에서 '존재'하는 법을 배운다. 남자는 점차 무의미한 반복처럼 보이던 삶이 자유로운 존재방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자신이 모래 구덩이의 '안'에 있으면서도 모래 구덩이의 '밖'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래 구덩이는 그가 종종 말하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공간, 즉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간으로 탈바꿈했고 그는 더 이상 그곳에서 도망쳐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자는 지금 여자의 곁에서 라디오를 사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품고 함께 모래를 퍼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끝내 '사망'으로 처리되었지만,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하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어느 때보다 진정 살아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모래의 여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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