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입학 후부터 '기획'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무렵 시도했던 기획은 모두 학교 과제나 공모전 수상을 위함이었기에,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아이디어를 고민하기에 급급했던 기억이 난다.
나를 이토록 성과에 집착하게 만드는 기획이라는 단어가, 어느샌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학교를 통해 배운 기획이란 기존의 것과 다르거나 참신한 것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런 것들에 점차 거부감을 느꼈다.
새로운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을 따라가기도 벅찬데, 그나마 온기가 있는 사람에게까지 '기획'이란 단어를 붙이다니. 처음 마주한 <사람을 기획하는 일>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그런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된 이유는, 유독 내 머릿속을 꿰뚫어 본 듯한 아래의 문장 때문이었다.
'주로 업무에서만 쓰는 [기획]이라는 단어를 우리네 사람들에게 쓰다니요. 마치 전략적으로 사람을 조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기획하기 위한 준비물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자보다는 따뜻한 조도의 조명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지금껏 기획에 대해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획의 진짜 의미
책의 저자인 편은지 PD는 기획을 '따뜻한 미래 서사'라고 설명한다. 기획이란 단어와 [따뜻한]이라는 형용사를 동시에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저자는 기획하는 일에 관한 한 권의 책 안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라는 말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에게 기획이란 그저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계획하고, 성과를 내는 차가운 수단에 가까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마음을 움직였던 콘텐츠들에는 모두 기획자의 따뜻하고 진정성 있는 시선이 머문 흔적이 고스란히 뭍어있었다. 그런 콘텐츠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기획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왜그리 무미건조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로망 속에만 존재하던 [진짜 선배님] 같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기획은 늘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일이었다. 타겟을 분석하고 니즈를 파악하는 법을 배웠지만, 정작 그 대상인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모든 기획의 중심에는 결국 사람이 있으니 그들을 더 자세히, 그리고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알려준다. 지금까지 내가 기획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공허해지고 점점 멀어졌던 이유는, 어쩌면 기술적인 방법론에만 매몰되어 '진짜 기획'을 하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사람을 기획하는 일 역시 기계적으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온전히 바라봄으로써 세상을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즐거운 일임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눈이 기획을 완성한다
언젠가 친구와 둘이서 서로의 유튜브 시청 기록을 공유했던 적이 있다. 매일 다른 영상을 찾아보는 친구와는 달리, 내 시청 기록에는 주기적으로 똑같은 영상의 썸네일이 줄지어 있었다. 왜 같은 영상을 보고 또 보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사실 처음 보는 영상을 1번 보고는 그 프레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읽어내기 어렵다. 자막이 있으면 자막에, 인물이 나오면 그 사람의 움직임에 시선이 쏠려 나머지 디테일을 놓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루틴을 누군가는 시간 낭비라고 했고, 직접 영상을 기획할 것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미련한건가 싶어 한 번에 모든 걸 읽어내는 연습을 한 적도 많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나의 지독한 집요함을 [통찰력]이라는 근사한 단어로 명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기획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특히 이승기를 '국민 남동생'으로 만들었던 편집자의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한 사람의 매력을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꼼꼼하고 다정하게 대상을 관찰했는지, 그리고 그 관찰을 어떻게 기획으로 연결했는지 친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그 길을 차근차근 따라가며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가진 '좋아하는 눈'이 기획자로서 가질 수 있는 훌륭한 자산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단지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기획의 기술을 전수하는 지침서를 넘어, 책을 집어든 독자가 가진 기질을 어떻게 활용하고 타인과 나누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다정한 길잡이 같다. 덕분에 이제는 '굳이' 같은 영상을 반복해 보던 내 루틴이, 누군가의 빛나는 점을 찾아내기 위한 소중한 준비 과정이었음을, 기분 좋게 믿어보려 한다.
기획을 배워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
이번 도서 리뷰는 온전히 필자의 경험과 생각에 집중하며 써내려 갔다. 전공도 무관하고, 현직자도 아니기에 그저 학문을 배우는 학생의 시점으로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글이,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끌림조차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일러두고 싶은 점이 있다면, 만약 기획에 대해 깊이 배워본 적이 없거나, 이미 기획된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보면서 익히려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될 책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기획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획하는 일 뿐만 아니라 본인이 선택할 모든 일에 좋은 지침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만약 기획을 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는 사람, 본인의 숨겨진 잠재력을 발견하고 싶은 사람, 기획을 더 잘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책 <사람을 기획하는 일>을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