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숨긴 말이 여과 없이 쏟아지는 세상의 초상은 얼마나 처연할까. 익명성에 의존하던 시대를 지나, 얼굴과 이름을 앞세우면서도 당당히 비정제된 ‘말’을 배설할 수 있는 현재엔 시시한 물음일 테다. 분열과 폭력으로 촘촘히 점묘된 이 시대가 군더더기 없는 답변이니까.
‘비정제된 말’이란 걸 세밀히 조명할 수 있을 텐데, 예컨대 앞선 문단에서 주안점을 둔 건 발화의 정치적 측면이다. 인간을 계급화하는 요소인 젠더, 인종, 국적, 자본, 장애, 섹슈얼리티 등을 공론장에서 다루는 방식 말이다. 나아가 더 미시적이고 개인적 차원으로 갈래를 펼칠 수도 있겠다. 친구, 가족, 불특정 다수와 주고받는 무시, 조롱, 비방 같은 것들.

<내 말 좀 들어줘>는 분류하자면 후자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주인공 ‘팬지’를 한국의 정서로 치환하면 욕쟁이 할머니쯤에 가까워 보인다. 상대가 혈육이든 오늘 처음 마주친 사람이든 공평히 말맛 좋게 욕지거리를 한다. 터무니없고 도의적으로 부적절하지만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걸출한 욕이다.
불행히 그녀의 발화는 오락을 위한 의도적인 장치가 아니다. 제대로 대화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두꺼운 자기방어, 그 작용으로서의 날카로운 공격성이 서려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 그 속엔 오락성이 있어서 재미가 느껴지나,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은 특정한 불편함을 더 크게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윤리적 존재로서 감지'하는' 것들과 별개로, 그녀의 삶을 응시하면서 감지'되는' 무언가가 있다. 발화 뒤에 따라오는 찰나의 멈칫함,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 근육이 증언하는 것. 팬지 역시 자기 발화의 결함을 모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병적인 상태. 이를 감지한 관객은 일종의 신경증적 장애가 있는 그녀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때 쉽게 흐를 수 있는 논의는 그녀의 장애가 타인에게 부과한 피해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지, 그 적절성에 관한 물음이다. 이런 흐름의 사유를 나는 함정이라고 단언하고 싶은데, 다수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와 수준 안에서만 이뤄지는 논의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질병’은 이미 한 사회의 보편적인 이해에서 벗어난 상태에 부과되는 낙인이기에 그렇고, 그 타당성을 판단하고 규제할 수 있는 기회는 권력을 가진 자에게만 주어지기에 그렇다. 질병이 인식을 포섭하지 못하고, 인식만이 질병을 포섭할 때 사회엔 진짜 질병이 창궐한다.
그렇다면 ‘이해’란 질병이라는 맥락과 정반대에 있는 판단처럼 보인다. 영화가 관객이 팬지를 이해해 볼 법한 요소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보호자의 애정을 적절히 받지 못했다는 그녀의 흐린 기억에만 의존해 추측할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정보는 없다. 어쩌면 중요한 건 그녀를 끝내 이해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영역 바깥에 놓인 그녀의 위치에 실질적인 좌푯값을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인물로 감독은 팬지의 동생 ‘샨텔’을 소환한다. 샨텔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시선을 떼지 않는 자다. 사람이란 누군가가 자신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는 걸 믿을 때야 겨우 꼬박 변화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고 믿는 편인데, 언니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몰이해가 당신을 떠나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샨텔 같은 인물 덕분에 생겨난 신뢰다.
혹자는 심드렁할 수 있다. 가족이니까, 좋은 동생이니까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주장이나, 나는 이 영화가 그저 병적인 특성을 지닌 대상을 묘사하고 그의 전폭적인 지지자를 옆에 두어 낙관적인 이상향을 상상하는 자기 위안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가 짚어내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내 말 좀 들어줘’. 앞서 언급한 모든 논의를 차치하고 결국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한 가지다. 자기 욕구를 정확히 표현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행위인가. 그 맥락에서라면 팬지는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유별난 존재이기 보단, 원하는 바를 원활히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의 한 갈래에 가까워진다. 자기 욕망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들은 팬지와 같은 공격성을 내비치진 않으나 거의 모든 대화에서 입을 얼버무리곤 한다. 적극적인 소통을 지향하는 샨텔의 두 딸도 초라한 삶의 비하인드는 은폐하고 거짓 웃음을 포장해 내놓는다. 누구든 어느 정도 자기 속에 말을 감춘다. 그렇게 생긴 공백에 자기 속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낯선 말이 채워진다.
상대가 자신을 곡해없이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마주 보는 이에 대한 찰나의 판단으로 말의 물길은 급격히 뒤틀린다. 대화의 삐걱거림, 즉 욕망의 불충분한 표현은 화자의 영역이 청자의 영역과 맞닿을 때야 비로소 발생하는 거다. 그러므로 책임은 나에서 너로 확장된다. 누구도 그 책임 소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책임을 짊어지는 건 온전히 개인의 선택이고, 어찌 됐든 책임을 나누어 맡는 건 고되다. 대부분은 외면하는 수고스러운 일을 샨텔을 지속했고 굳어버린 팬지의 마음에 어떤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냈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를 낙관하고 싶어지는데, 영화의 백미는 그 기대를 배반하는 데 있다. 분명 무언가 변했는데 그게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얼마나, 어디까지 바뀌었고 바뀌어야 하는가. 혼란 속에서 상처와 몰이해는 여전히 되풀이된다. 인물도, 관객도 혼란스럽다. 혼돈의 한 가운데에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결말은 결국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허무주의로의 귀결인가. 그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변화의 씨앗이 언제든 흩뿌려지고 발아할 수 있다는 주장에 가깝다. 다만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는다. 그 모호함, 이해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복잡함, 기존의 관성으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들의 총합이 관계인 거다. 굳이 수고를 거듭하며 관계를 맺는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아니, 어디가 되어야 하는가. 그건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연히 사랑이어야 하지 않냐고, 왠지 슬프게 읊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