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렌 네미롭스키의 《고독의 와인》은 작가 자신의 삶이 투영된 소설이다. 나르시시즘적인 어머니와 돈을 좇는 아버지, 사랑받지 못한 유년 시절, 프랑스에 대한 동경까지. 소설 속 엘렌의 삶은 네미롭스키 자신의 경험과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읽는 일은 한 인물의 성장사를 따라가는 동시에, 한 작가가 오래전의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고독의 와인》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미래의 엘렌이 과거의 엘렌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다. 막스와의 재회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현재의 이야기 사이로 훗날의 엘렌이 불쑥 개입한다. 그녀는 어린 자신이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것을 알고 있다.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 때문에 상처받았는지, 그 순간이 훗날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도 안다. 마치 시간의 반대편에서 오래전의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거는 듯하다.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이 작품에서 이러한 장치는 자연스럽게 네미롭스키 자신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엘렌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성장한 사람의 언어로 당시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고독에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고독의 와인》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시간이 흐른 뒤 과거를 얼마나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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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미롭스키는 인간의 욕망을 빠르고 선명하게 포착한다. 벨라는 젊음과 아름다움, 남성의 관심을 갈망하고 카롤은 돈과 도박에 매달린다. 막스는 쾌락에 민감하며, 어린 엘렌 역시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어머니를 향한 복수심에서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엘렌의 유년 시절에 유일한 안식처처럼 존재했던 로즈 양조차 엘렌과 헤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 채 무너진다. 돈과 허영, 성욕, 계급 상승의 욕망, 늙음에 대한 공포가 각자의 모습으로 인물들을 움직인다.
그래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첫인상이 매우 강하다. 벨라는 처음부터 벨라답고, 카롤은 카롤답다. 이후의 사건들 역시 처음 드러난 성격을 거듭 확인시킨다. 한편으로 이러한 선명함은 네미롭스키 특유의 냉정한 인간 관찰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누군가를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오히려 한 가지 모습으로 굳혀버린다는 뜻일까.
흥미로운 것은 《고독의 와인》이 이 질문에 단순한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벨라는 허영심 많은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사랑받고 싶어 하고, 짧게나마 딸에 대한 애정도 드러낸다. 엘렌 역시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다 때때로 흔들린다. 카롤의 돈에 대한 집착 뒤에서도 어떤 불안과 공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한 악역으로만 그려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순간들은 길게 머물지 않는다. 잠시 다른 얼굴을 보여준 인물들은 이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벨라는 다시 젊음에 집착하는 어머니가 되고, 카롤은 다시 돈에 몰두하는 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고독의 와인》은 타인을 이해할 가능성을 여러 차례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완전히 펼쳐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 빈자리 때문에 독자는 오히려 계속 생각하게 된다. 벨라는 왜 그렇게까지 젊음과 사랑에 집착했을까. 카롤은 무엇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좇았을까. 그리고 엘렌은 그들의 삶을 얼마나 이해할 필요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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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미래의 엘렌이 과거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서술이 다시 중요해진다. 엘렌은 시간을 건너 어린 자신에게 돌아가 기억을 재서술한다. 어린 엘렌의 상처를 이해하고,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대신 설명해준다. 하지만 벨라나 카롤의 과거에는 같은 방식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 차이는 《고독의 와인》이 독자에게 남기는 가장 복잡한 질문이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자신을 상처 입힌 사람까지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상처가 이해와 용서로 끝나야 한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현실과 멀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버지와 화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지키는 것 역시 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고독의 와인》의 마지막에서 엘렌이 선택하는 것도 바로 그런 삶이다.
오랫동안 품어왔던 복수에 대한 열망을 내려놓은 엘렌은 아버지가 남긴 적은 재산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새로운 삶을 향한다. 어린 시절 자신을 억압했던 가족의 세계에서 마침내 빠져나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장면의 감정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엘렌이 자유를 느끼는 순간, 벨라는 이미 늙고 쇠약해져 죽음을 향하고 있다. 어머니가 자신을 지배하던 힘을 잃어가는 때에 딸은 비로소 자신의 자유를 발견한다.
그것을 잔혹하다고 부를 수도 있고, 해방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맞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덮고 나면 ‘엘렌은 성장했는가’라는 질문보다 조금 다른 질문이 남는다. 고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상처를 준 관계에서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혹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더 이상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제목의 ‘와인’은 이러한 질문을 더욱 오래 남긴다. 와인은 시간을 거치며 숙성된다. 엘렌 역시 시간이 흐른 뒤 어린 자신을 바라보고, 당시의 상처와 고독에 새로운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억은 숙성되고, 어떤 기억은 그대로 남는다. 어떤 상처는 새로운 의미를 얻고, 어떤 상처는 끝내 이해되지 않은 채 한 사람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와인은 씁쓸한 맛을 남기는 고독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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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와인》의 인물들이 때때로 지나치게 선명하고 고정되어 보인다는 점이 역시 이 작품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단순히 인물 조형의 한계인지, 아니면 한 사람이 상처받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것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네미롭스키가 등장인물들의 기억에 온전히 들어가지는 않더라도 과거를 완벽하게 정리된 장소로도 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해와 오해, 애정과 증오, 독립과 고독이 한 사람의 기억 속에 함께 남는다.
《고독의 와인》은 결국 과거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독자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시간이 흐른 뒤 상처를 준 사람을 다르게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지금의 내가 견딜 수 있는 모습으로 그를 다시 그려냈다는 뜻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볼 때 마주하는 것은 그때의 사람들 그 자체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내기 위해 다시 만들어낸 그들의 초상일 수 있다.
작품이 남기는 것은 어쩌면 엘렌이 찾아낸 답보다도, 그 답 주변에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이런 질문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