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혹은 렘브란트,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 그것들은 마치 우리에게 말을 걸며 내면의 고통이나 영혼의 깊이를 호소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들의 자화상은 단순히 외양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인적·사회적 정체성과 삶의 흔적을 함께 담아냄으로써, 관람자로 하나의 인격적 존재를 마주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영적인 정체성’까지 포괄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하지만 폴 세잔의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이 작품은 관람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작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정체성에 대한 어떠한 직접적인 호소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 결여된 듯한 인상을 주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일종의 언캐니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세잔이 자신을 그린 것은 ‘나’라는 주체의 심리를 탐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통합된 자아의 환상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근원적인 층위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눈에 보이지도, 명확히 규정할 수도 없지만, 주체 형성 이전에 이미 흔적으로 남아 있는 어떤 결여의 차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점에서 자화상을 그린다는 행위는 자크 라캉이 말한 ‘거울 단계’의 재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세잔은 이 거울 단계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거울이 만들어내는 통합된 자아의 환상과 그 이면에 자리한 소외를 드러낸다. 즉, 자화상이라는 매개를 통해 ‘완결된 나’라는 이미지를 해체하고,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상태로서의 주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본 글은 이러한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을 바탕으로, 세잔이 어떻게 통합된 자아의 환상을 해체하고, 결여와 결핍, 상실을 내포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
세잔의 자화상은 관람자뿐만 아니라, 거울 속 자기 자신과도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어떠한 감정적·리비도적 투자도 차단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비현실적인 각도로 들고 있는 팔레트와 깊이를 지워버린 평면적인 배경에서 비롯된다. 이로 인해 우리의 시선은 화면 내부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세잔의 형상 앞에 멈춰 서게 된다.
그는 굉장히 단조로운 청회색 계열의 수트를 입고 있고, 그의 턱수염과 머리의 색깔도 비슷한 색조로 표현이 되어 있다. 심지어 팔레트 위에도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계열의 색조들이 올려져 있다. 그의 시선은 보통의 자화상과는 달리 관람자를 응시하지 않고 이젤 위 캔버스를 응시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마치 잠깐 어떠한 생각에 몰두하며 주변과, 이를 보는 관람객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것만 같다.
그의 단조로운 색채와 절제된 표현, 그리고 관람자를 응시하지 않고 캔버스를 향한 시선은 자화상에서 기대되는 자기 표출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는 마치 이젤이나 팔레트와 같은 사물처럼 정지된 존재로 나타나며, 자신의 정체성이나 내면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비워낸 듯한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거리감은 마치 거울로부터 일정하게 떨어진 채, 자신을 낯선 대상으로 바라보며 그린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은 왜 등장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을 통해 해석해볼 수 있다.
라캉은 주체를 코키토의 통합된 중심으로 이해하는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를 비판하고, 주체는 본질적으로 분열된 존재이며, 타자와의 관계 없이는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라캉적 주체’를 제시한다. 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개념을 계승하면서, 주체가 상징계 속에서 언어라는 기호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와 관계 맺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이 바로 ‘거울 단계’이다. 이는 주체가 아직 상징계에 진입하기 이전, 상상계에 머물러 있는 시기이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유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을 하나의 통합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아직 신체를 조각조각 나눠진 부분들로 경험하던 유아는, 거울 속 완전한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통합된 주체unified self’라는 이미지를 획득하고 자신에 대한 자율성과 통제력, 그리고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가시적이긴 하지만 실제의 나와는 공간적으로 분리된 외부의 형상이며, 실제 우리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 허구적 동일성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유아는 이 통합된 이미지에 매혹되어 거울이 주는 환상에 속아넘어간다. 이로써 주체는 최초로 자기 인식을 획득하는 동시에, 타자의 시선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 편입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라캉의 이론은 사회가 이미 개인의 내면에 구조적으로 내재해 있음을 시사한다. 즉, 나의 고유하고 자율적인 인식이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아이러니하게도 타자가 없이는 자신을 ‘독립된 주체‘로 인식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아는 필연적으로 소외를 동반한다. 거울 이미지는 타자의 시선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형상을 허구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타자의 시선을 우리의 눈으로는 결코 완전히 파악할 수 없기에, 그 시선에는 필연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결핍의 지점이 남게 된다. 이 결핍은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공백으로 남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욕망이 발생한다. ‘오브제 아object a’는 이러한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유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이유로 거울 이미지로 포착되지 않는 자아의 잔여 영역이 남게 되고, 여기에는상징계 진입과 함께 상실된 ‘사물 본체성(The Thing)’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주체는 이러한 결핍을 은폐하기 위해, 스스로를 완전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환상을 지속적으로 믿게 된다.
거울 단계의 해체와 상실된 자아의 가시화
자화상은 유아기에 경험했던 거울 단계의 과정을 다시 경험하도록 해주는 독특한 공간이다. 화가는 실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반영 이미지’를 바라보고, 이를 캔버스 위의 ‘표상된 이미지’로 전이한다. 이 과정에서 자화상은 거울이 지닌 ‘자기-전시적 가시성’을 반복하면서, 단순한 재현을 넘어 자기 인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장으로 기능한다.
미국 철학자이자 문화 이론가인 실버만(Hugh J. Silverman)은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세잔의 자화상을 거울 단계와 연관 지어 해석한다. 그는 세잔이 반영 이미지를 표상된 이미지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철저히 타자로 취급함으로써, 거울 단계에서 분열되며 상실된 자아의 흔적을 구조화했다고 본다. 이때 자화상은 보이지 않는 ‘타-자기other-I’가 ‘새로운 가시성’을 획득하는 공간이 된다.
그렇다면 세잔은 통합된 자아라는 거울의 환상 속에서, 결코 직접적으로 포착될 수 없는 상실된 자아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었을까. 실버만에 따르면, 세잔이 반영 이미지와 표상된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의도적으로 극대화함으로써 이러한 상실을 시각화한다. 이에 더해 미술사학자 전영백은 그의 자화상에서 나타나는 냉담함과 비생동적인 정서, 즉 세계와의 단절을 전제로 하는 멜랑콜리의 구조를 통해 두 이미지 간의 간극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본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분석에 따르면, 멜랑콜리는 불충분한 애도로 인해 주체는 모성과의 분리를 완결짓지 못하고 언어계로의 진입에 실패한 상태이다. 멜랑콜릭한 사람은 상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대상에 집착한다. 이로 인해 상실에서 오는 결코 언어로 형용될 수 없는 압도적인 슬픔, 고통에 압도되고, 외부 세계와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는 탓에 이 슬픔을 소중히 여겨야 할 대체물로 여기고 붙들어두려 한다. 결국 주체는 언어적 상징화에 실패하게 되고, 결코 상징화될 수 없는 미지의 개념인 ‘사물 본체성The Thing’에 연계되려는 욕망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주체는 반상징적, 반언어적 심리구조에 머물며 외부 세계와 단절된다.
그러나 세잔과 같은 멜랑콜릭 예술가는 역설적으로 이러한 상태 속에서 예술의 상징 활동으로 승화시킨다. 그에게 있어 멜랑콜리가 지닌 사물 본체성에 연계되고자 하는 욕망은 거울 단계의 탈환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그는 거울 단계의 환상에 자발적으로 기만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 매커니즘을 유보함으로써 사물 본체성의 정서가 남아있는, 통합된 자아 이미지가 포착하지 못하는 잔여, 즉 ‘아직 정립되지 않은 자아yet-to-be-self’ 흔적을 감지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세잔은 통일된 자아의 이미지에 동일시되지 않고, 그 이면에 남아있는 낯설고 언캐니한 자아의 흔적을 포착한다. 그의 자화상에 나타나는 세상과 분리된 듯한 무표정한 얼굴과 냉담한 정서는 반영 이미지와 표상 이미지를 분리시키며, 그 속에서 거울 단계에서 소외된 파편적이고 불완전한 자아의 잔여를 어렴풋이 가시화한다.
영국의 소설가인 로렌스(D.H. Lawrence)는 세잔이 진부한 ‘클리셰cliché’에서 벗어나 물체의 본질적인 부분인 ‘사과성 appleyness’을 포착하려고 한 예술가라고 한 바 있다. 이처럼 세잔이 사물의 외형이 아니라 그 본질을 포착하려 했듯, 그의 자화상 또한 표면적 자아가 아니라 근원적인 자아의 잃어버린 흔적을 드러내는 시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과성을 표현해내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잔의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거울 단계가 만들어내는 통합된 자아의 환상을 해체하고, 낯설게 드러난 자기 모습을 통해 그 기만과 소외의 메커니즘, 나아가 자아의 결핍과 상실의 구조를 가시화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본질적으로 분열과 결핍 위에 성립한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나가며: 우리 존재의 본질
세잔의 <팔레트를 든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재현을 넘어, 우리가 믿어왔던 ‘통합된 자아’의 환상을 근본적으로 흔든다. 라캉의 거울 단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의 완결된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이미 그 안에는 타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일부분이 소외된다. 즉, 우리의 자아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분열과 결핍 속에서 성립하는 구조적 산물이다.
세잔의 바로 이 지점을 드러낸다. 그는 통합된 자아를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거울 환상 이면에 남겨진 파편적인 미지의 자아, 아직 정립되지 않은 불완전한 자아의 잔여를 멜랑콜리의 구조를 통해 화폭 위에 드러낸다. 이때 드러나는 자아는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왔던 ‘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결핍되고 파편화된, 그래서 무척이나 낯설고 때로는 외면하고 싶어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아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완결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결핍과 상실을 내포한 채 끊임없이 형성되어 가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 말이다. 따라서 세잔의 자화상은 하나의 초상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왔던 존재의 본질 - 낯설고, 불완전하며, 결코 완전히 포착될 수 없는 자기 자신 - 을 마주하게 하는 거울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Chun, Young-Paik(2006), 「Melancholia and Cezanne’s Portraits: Faces beyond the Mirror’ in Psychoanalysis and the image」, Griselda Pollock(ed.), London: Blackwell
전영백(2021), 『세잔의 사과』 (개정확장판), 한길사
전영백·오세령·김세정(2023), 『전영백의 더 세미나: 기호학·정신분석학 편』, 자유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