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CD, [클라우드 쿠쿠랜드]
내가 가장 처음으로 구매한 CD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정우의 [클라우드 쿠쿠랜드].
‘왜 굳이 CD로 음악을 듣느냐에 관한 생각’이 이 글의 주제이긴 하지만, [클라우드 쿠쿠랜드]는 나를 CD의 세계에 입문하게 해준 앨범인 만큼 조금 자세히 이야기하고 넘어가고 싶다.
우연히 이 앨범의 수록곡 [JUVENILE]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 모든 일이 공평하게 흘러갈 순 없어요 맞아요
같이 죽자던 엄마는 나랑 제일 친한 친구가 됐고요
작년에 보내준 우리 집 강아지 한 번만 더 보고 싶고요
늙기 싫고요 아프기도 싫어요 노력 없이 좋은 추억 만들고 싶어요
- 정우, [JUVENILE] 중
평상시에는 은유적인 가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곡을 들으며 감정을 솔직하게 내뱉는 데서 오는 쾌감과 해방감을 제대로 느꼈고, 그때부터 정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입덕은 곡 [JUVENILE]로 했지만, 곧 [클라우드 쿠쿠랜드] 앨범의 다른 곡들도 내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되었다.
에어팟만 귀에 꽂았다 하면 [클라우드 쿠쿠랜드]의 수록곡을 들었고,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 앨범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CD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온갖 판매처를 뒤져보았지만 이미 전부 품절된 이후였다.
그러다 어느 날 재발매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도 하지 않고 주문했다. 사실 당시엔 CD 플레이어도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소유하는 방법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사실 말도 안 되는 소비였다. 앨범의 수록곡은 이미 스트리밍으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나는 CD 플레이어도 없었다. 그런데도 재발매 소식을 듣자마자 고민 없이 주문했다. 나는 왜 들을 수도 없는 CD를 가지고 싶었던 걸까.
“Our possessions are a major contributor to and reflection of our identities.”
소유물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이자, 이를 반영한다. (필자 번역)
- Russell W. Belk(1988), 「Possessions and the Extended Self」
이 개념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CD를 가지고 싶었던 마음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을 물건의 형태로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좋아하는 책을 소장하고, 전시를 본 뒤 엽서를 사 오는 것처럼 말이다. 스트리밍으로 언제든 들을 수 있어도, 내가 좋아하는 앨범을 직접 만지고 내 방 한편에 둘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앨범의 전곡을 온전히 감상하고 싶을 때
휴대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는 듣고 싶은 노래를 검색해 바로 재생하면 된다. 좋아하는 곡들만 골라 손쉽게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수도 있다. 반면 CD 플레이어로 원하는 곡을 들으려면 수록곡을 하나씩 넘겨 그 곡에 도달해야 한다.
이러한 불편함이 오히려 CD로 음악을 듣는 일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다.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해 음악을 듣다 보면 좋아하는 노래만 자주 듣게 된다. 상대적으로 덜 좋아하는 수록곡은 거의 듣지 않게 되고, 어떤 때는 내가 듣고 있는 노래가 어느 앨범의 수록곡인지조차 모르기도 했다.
CD 플레이어로 음악을 감상하면 내 마음대로 순서를 정해 듣는 것이 번거롭기에, 자연스럽게 아티스트가 정해놓은 순서대로 앨범 한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하게 된다.
앨범 패키지를 구경하는 재미
특히 K-POP 팬덤 문화의 영향으로 한국 아티스트들의 실물 음반은 패키지 디자인이 굉장히 다양하고 화려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앨범 자체를 하나의 물건으로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아래에는 그중 내가 인상 깊게 본 음반 디자인 몇 가지를 가져와 봤다.
NEWJEANS(뉴진스) - 1ST EP [NEW JEANS] [BAG(BLACK) VER]
(출처: Weverse Shop)
CDP를 담을 수 있도록 일부러 동그란 모양의 가방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가방과 함께 CD, 포토카드, 핀업북 등이 하나의 패키지로 구성되어 있다. 가방에는 앨범의 분위기와 아티스트를 상징하는 그래픽이 프린팅되어 있다.
실제로 사용하기보다는 소중히 보관하는 팬들이 더 많을 것 같긴 하지만, 앨범 패키지가 단순한 포장을 넘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가방이 된다는 점이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RED VELVET(레드벨벳) - [Cosmic] (Cosmie Ver.)(SMART ALBUM)
(출처: SMTOWN &STORE)
스마트앨범에는 스마트폰에 NFC 태깅을 하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NFC 앨범이 들어 있다. NFC 앨범은 레드벨벳 멤버 5명을 상징하는 캐릭터 인형 키링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다. 이외에도 멤버 이미지가 프린팅된 미니 스탠드와 포토카드, 포스터 등이 하나의 앨범 패키지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음악을 담은 매체 자체를 캐릭터 인형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음반이 단순히 음악을 듣기 위한 물건을 넘어, 소장하고 구경하는 굿즈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f(x) - The 2nd Album - Pink Tape
(출처: SMTOWN &STORE)
K-POP 팬들 사이에서 ‘레전드’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앨범, f(x)의 [Pink Tape]. 앨범명처럼 실제 음반 패키지를 핑크색 비디오테이프 형태로 디자인한 점이 인상 깊었다. 앨범 제목을 단순히 패키지에 적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앨범 자체를 제목 그대로 하나의 ‘Pink Tape’로 만들어버린 디자인이다.
이런 앨범들을 보고 있으면 이제 실물 음반은 단순히 음악을 담아두는 물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앨범마다 아티스트의 분위기와 색깔이 디자인에 담겨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CD를 살 때는 음악을 듣는 것만큼이나 앨범이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졌을지 기대하게 된다.
음악을 듣기까지의 과정마저도 즐기고 싶어
요즘은 CD뿐만 아니라 필름 카메라, LP, 종이 다이어리처럼 조금 불편하고 오래된, '아날로그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이미 휴대폰 하나면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음악도 들을 수 있고, 일정도 기록할 수 있는 시대지만, 굳이 손이 더 많이 가는 방법을 선택한다.
나에게는 CD가 그렇다. CD를 케이스에서 꺼내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기까지 스트리밍보다 몇 번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 듣고 싶은 곡을 바로 찾기도 어렵고, 밖에서 간편하게 가지고 다니며 듣기도 힘들다.
그런데 나는 그 불편함이 좋다. CD 보관함에 꽂힌 여러 장의 음반 중에서 무엇을 들을지 고르는 일부터 시작한다. 한 번 플레이어에 넣은 CD를 다시 꺼내 케이스에 넣어두는 건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에, 지금의 내 기분과 날씨에 어울리는 앨범을 조금 더 신중하게 고르려고 한다.
케이스에서 음반을 꺼내 플레이어에 넣는 짧은 과정 덕분에 ‘지금부터 음악을 듣는다’는 기분도 든다. 마치 음악을 듣기 전 마음을 정돈하는 작은 의식을 치르는 것 같다.
음악을 듣는 순간뿐만 아니라, 무엇을 들을지 고민하고 음반을 꺼내는 과정까지 음악 감상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요즘도 CD로 듣니?”
내가 CD를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어느 날 CD 몇 장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이소라의 [영화에서처럼],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빛바랜 사진이 표지로 끼워진 음반(몇 집인지는 모르겠다.) 등등. 엄마가 예전에 사서 듣던 앨범들이었다.
예전의 엄마에게는 당연했던 음악 감상 방식이, 시간이 흘러 나에게 일부러 찾아서 즐기는 취미가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예전에는 다 CD로 들었는데. 요즘도 CD로 듣니?”
이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말고도 이 레트로한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많은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