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와 레트로는 그 말 자체가 상충한다. 트렌드는 젊은 세대가 선도한 문화를 앞선 세대가 따라가며 확장되는가 하면, 레트로는 앞선 세대의 산물을 후세대가 따라 하며 환기되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야탑역 부근에는 ‘레트로와 트렌드가 공존하는 음악 공간’이 있다. 사견이 아니라, 사장님이 직접 포털에 명기해 둔 것이다. 보통 자신감으로는 택하기 어려운 캐치프레이즈나, 그곳에 조금만 머무르다 보면 십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다양한 나이대가 오가는 풍경 속 그들의 신청곡은 그 나이테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반복한다.
이런 곳에선 곡을 신중히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떠냐면, 마치 올림픽 개막식을 준비하는 음악감독처럼 다른 사람들이 신청하는 곡에 깐깐한 시각을 가진다. 지나치게 유명한 곡이나 최신 유행가가 나오면 좀 아쉽다. 한숨을 쉬거나 무어라 나무라지는 않겠지만, 그냥 좀 아쉽다.
동시에 라디오 DJ가 된 듯, 한 곡 한 곡 고심이 선별하여 신청한다. 평소 좋아하거나 꽂힌 노래를 웅장하게 듣고 싶은 기대감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줘도 될까 하는 우려감이 앞선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안다는 사실과 받아들이는 인식은 별개의 문제이다. 적어도 나는, 타인을 의식하기에 그렇다. 제아무리 통상적인 ‘사람’을 일컫더라도,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결국 ‘나’이므로, 사람이라는 기준 자체가 나에게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말인즉슨,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려 해도 묻어나오는 주관성은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강박 아닌 강박 때문에 오히려 제대로 곡을 신청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특히 사장님이 워낙 음악에 박식한지라 쉬운 선택을 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그날은 막상 선택할 곡이 없어, 화장실을 갔다 온 사이 마주친 벽보에 그려진 가수의 노래를 신청했다.
가게에 어울리는 곡과 그렇지 않은 곡을 오가며 듣다가,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누군가가 따로 신청한 것은 아니었고, 사장님 자신이 자막을 입혔다며 공연 실황을 보여주었다.
가난한 소년이 집을 떠나 홀로 뉴욕에 왔다.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그가 택한 것은 복싱. 맞고 또 맞는다. 맞고 또 맞다 보니, 어느 정도 먹고살 만해졌지만, 그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빠져나갈 수 없는 늪에 빠진 복서의 애환 담긴 이 가사를, 반세기 전에 미국의 어느 포크 듀오는 읊조렸다.

비단 복서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넓다지만 저마다 한정된 ‘링’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면서.
그가 왜 이 노래를 택했는지는 모른다. 그날따라 유독 청춘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아서였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나는 가장 충실한 관객이었다고 자부한다. 평소 그 곡이 수록된 앨범을 유난히 좋아한 것도 맞지만, 무엇보다 지난번 방문했을 때 타이틀곡을 신청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막힌 우연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나를 기억해서 재생한 영상은 아닐 것이다. 그때 우리는 딱히 추태를 부리지도 않았고,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 다소 특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70년도 전후에 나온 노래를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 신청했다는 정도인데, 기억할 만한 지나침은 아니었다. 그냥 앨범도 아니었고, 세기의 앨범,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아무리 유명한 곡일지라도, 세상에 하고많은 명곡 가운데 수록곡으로 이어진 우연은 신기할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듣지 않았던 앨범을 꺼냈고, 먼지가 조금 쌓인 CD 플레이어를 열었다. 그리고 되뇌었다.
우연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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