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 대해 떠올려보라. 그의 외양을 자세히 상상할 수 있다면 더 좋다. 아마 그는 꽤나 낡아 보이는 더플백을 매고, 보풀이 잔뜩 인 비니를 썼을 것이다. 궁핍한 행색으로 글감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도시를 돌아다닐 것이다. 좀 없어 보여도 괜찮다. 영혼을 담은 그의 두 눈은 아주 생생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아마 그의 집은 한 평 남짓의 남루한 공간일 것이다. 넓고 사치스러운 공간은 아니겠지. 시인에겐 사치란 죄악이니까. 특히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가 외투 주머니를 뒤진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꺼내 든 건 휴대폰이 아닌 낡은 손목시계다. 예술가라면 응당 아날로그의 미덕을 알고 있어야만 하고, 디지털과 첨단이 가져다주는 편리함을 경계해야 하니까.
이 묘사가 조금은 과장되게 느껴질지라도, 당신이 시인, 내지는 예술가를 생각했을 때 떠올랐을 순간적인 이미지들은 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 심오하고 예민하며 낭만적인 느낌. 일반의 사람들은 쉽게 휘둘리고 마는 어떤 것들에 쉽게 휘둘리지 않고, 일반의 사람들은 포착하지 못하는 부분을 아주 예리한 감각으로 발견해 내는 사람들. 그들은 주류가 추구하고 욕망하는 어떤 것들과는 멀어져 있어야 하고, 일반이 기피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 어떤 것들과는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예술가가 아닌 누군가들은 그렇게 쉽게 그들을 대상화해 버리곤 한다. 켄트 존스 감독의 <나의 사적인 예술가>는 이러한 클리셰, 특히 예술가와 관련한 어떤 허황된 이미지들의 반대편에서 서서,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예술가가 마주하게 되는 실제의 삶과 결국 깨어지고 마는 허상을 그려낸다.
<나의 사적인 예술가>가 가진 특이한 지점은, 이러한 예술가의 실제 삶과 허상의 괴리를 포착하기 위해 영화가 선택하는 시점이 예술가 외부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예술가에게 주어지고 마는 외부의 클리셰들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클리셰를 내면화해 버린 당사자를 등장시켜 그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가지는지를 그저 포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그다지 숭고하지 않다. 아날로그를 지향하고 디지털과 첨단을 지양하자며, 예술의 본질은 그곳에 있는 것이라며 인플루언서들을 비웃는 젊은 예술가들은 작품을 발표하곤 자신들에게 내려질 평가를 확인하기 위해 불안한 듯 웹페이지를 무한 새로고침 하고, 믿을만한 동료 예술가가 칭찬했다는 이유 하나로 읽어본 적도 없는 작품을 추앙한다. 그들은 예술가 자신이면서도 자신들에게 부여되는 클리셰에 대항하기는커녕 몸소 내면화하고 실천하며, 심지어는 이를 자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둔한 영혼들이다. 예술에 대해서 누구보다 쉽게 떠들지만 결코 그 본질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예술이 수반하고야 마는 어떤 것들에 매혹되어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는, 단지 나르시스트들 뿐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이 낯부끄러울 정도로 익숙한 기시감이란. 예술을 한다는 사명감 혹은 자의식에 취해 본질에는 결코 가닿지 못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안타까울 정도로 현실과 유리된 허상에 도취된,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있다. 언젠간 그 환각의 코마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면 마주하게 될 현실의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영원할 것 같은 이 ‘예술병’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유일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우리의 늙은 예술가인 에드 색스버거다. 투박한 외투를 걸치곤 어딘가 심오한 표정을 한, 젊을 적 시집 한 편을 내곤 30여 년간 우체국에서 일해온, 어쩐지 첫 단락의 과한 묘사와 딱 들어맞는 예술가의 기운을 가진 그는 젊은 예술가 집단에 의해 ‘재발견’되었다는 이유로 과거에 ‘시인’으로서 활동하던 시절의 코마 상태에 다시금 빠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마음속 한쪽에 접어두었던 명성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며, ‘유능한 예술가’라는 자기 인식을 재정립하게 된다. 예술과는 관련 없는 기존 그룹과의 불화와, 예술을 제외하곤 전혀 연관이 없는 새로운 그룹과의 연결은 뒤늦은 명성이 가져다준 뒤늦은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그야말로 Late Fame, 젊고 어린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뒤늦은 명성을 경험하던 그는 결국 점점 그들과 자신의 차이에 대해 깨닫게 되고, 그들이 자신에게 내보였던 추앙과도 같은 존경이 사실은 허상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뒤 그가 향한 곳은 결국 일상의 공간이다. 자신이 원하던 것은 예술이라는 본질에 다시금 흠뻑 젖어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수반하는 인정과 명성이었다는 것을, 그는 시인할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는 시를 쓸 수 없다는 깨달음, 매료되었던 것은 예술이라는 본질이 아닌 명성이라는 허상이었다는 것, 결국 향해야 할 곳은 무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이라는 사실.
비주류와 주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일반의 누군가가 비주류에 속해있다면 그는 아마 주류에 속하기 위해 몹시 애를 쓸 테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로 칭하거나 혹은 예술가로 평가받는 누군가라면 자신이 비주류에 속해있는 것이 짐짓 뿌듯할 것이다. 예술이든 뭐든, 일단 그게 좋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불러올 환각에 대해서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이 정말로 좋은지, 아니면 그것이 불러온 어떤 것들이 좋은 것인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가 수반하는 매혹적인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쩐지 그들을 향한 조롱 같지만 단순히 조롱뿐만은 아닌 것 같은, 삶의 복잡함과 허상에 혼란해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연민을 담은 응원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