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고발이 아닌 발설의 몸짓 - 내가 물에서 본 것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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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령 감각이 존재와 동일하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감각한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쉽고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감각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몸은 어쩌면 존재의 다른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판단을 내려 보다가도, 몸이 존재 그 자체라며 당당히 그 가치를 말하기엔 우리의 몸은 너무 취약하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아 버리고 만다.
몸은 취약하다. 그는 너무 취약해서 존재를 붙들지 못한다. 취약해서 외부의 어떤 것으로 인해 몸이 존재와 분리되는 것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토록 취약하지만 어쩌면 존재의 전부일지도 모르는 몸을 가지고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이러한 몸의 취약함을 통해 느낀 낯섦을 기꺼이 만끽한다. 그리고 다다른다. 가장 인간적인 곳으로.
국립현대무용단의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수차례의 난임 시술을 받은 김보라 안무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시작된 몸짓이다. 이것이 왜 이야기가 아닌 몸짓이냐 하면, 이는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인간의 말로 풀이되는 정제된 ‘언어’가 아니라, 창작자가 직접 시술을 경험하며 느낀 몸에 대한 생경함이 빚은 비인간적인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난임 시술을 통해 존재가 느낀 몸의 낯섦을 계속하여 표현하고자 한다.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몸, 내가 차마 다 감각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몸 안의 몸, 나라는 존재에서 벗어난 나의 몸과 그 몸이 부딪히는 외부의 또 다른 몸들. 그 모든 것은 마치 부레 같은 세포들을 덕지덕지 단, 무대 위 무용수들의 몸으로 변하여 계속 움직이고 섞인다. 부딪히고 질척댄다.
감각할 수 있는 어떤 것과 전부를 감각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들의 마찰과 섞임은 이성이 만들어낸 피상적인 ‘말’로는 다 표현될 수 없기에, 무대 위의 몸들은 전혀 조화롭지 않은 방법으로, 다시 말해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서로의 존재를 온몸으로 감각한다.
어떤 도달점(성공 혹은 실패)으로 향하기 위해 몸과 기술은 프로젝트에 투입되고, 이때의 ‘도구’는 몸이 되기도, 기술이 되기도 한다. 인격과 주체, 그리고 이성을 가졌기에, 우리는 몸이 도구화되는 그 과정을 생경하게 느끼고, 더 나아가 무력감을 느끼기도 하며 의학 기술의 과정 안에서 인간의 존재가 도구화 되었다며 말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생각한 기술 환경 안에서의 인간의 위기감일 뿐이다.
프로그램 북에서도 언급했듯,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인간과 기술의 낯선 공생 속에서 무한히 변화하는 몸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대 위의 몸들은 때로 뒤로 걷는다. 그 몸들은 낯섦과 생경함을 의도한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그 위기감을 인정하고, 비인간의 몸짓을 의도하여 영역간의 경계를 허문다. 비인간의 물과 인간의 물, 그 조화의 순간을 이해하고자 이들은 기꺼이 뒤로 걷는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아마 이 지점에서 그들의 몸짓의 방점을 찍는 듯하다. 이들은 기술이라는 비인간의 물(혹은 몸)과 인간의 물이 기술 환경 안에서 어떻게 섞이고 마찰하는지, 기술 혹은 인간이 아닌, 기술과 인간이 ‘함께’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포착하여 비인간과 인간의 어느 영역에도 치우치지 않은 관점을 통해 ‘몸’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한다. 난임 시술의 과정에서 쉽게 재단되었던 여성의 몸의 개념은 이러한 관점을 통해 성공과 실패라는 단일한 결과가 아닌, 보다 본질적이고 원천적인 장소(기술 환경의 실행되는)로서의 가치를 갖게 된다.
이들이 비인간의 몸짓을 의도하여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영역을 지우고 중용(Neutral state)의 상태를 지키면서까지 도달한 곳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인간적인 몸에 대한 사유다. 프로그램 북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이들은 ‘인간 되기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다시 인간 되기를 실천하기’를 원했고, 어쩌면 그것이 창작이라는 예술이 닿고자 하는 가장 확실한 도달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행위는 비인간의 몸짓을 빌려서라도 인간됨을 다시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구원과 위로의 춤을 춘다.
몸짓은 질문도 대답도 되지 못한다. 그곳엔 어떤 가치 판단도 없다. 그저 생동할 뿐이다. 감각의 가장 가까운 곳, 하지만 전혀 그것의 전부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 내밀하고도 긴밀한 곳에서 ‘몸 안의 몸’은 계속하여 변화한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난임 시술의 성공, 실패, 또는 수치화된 모든 피상적인 평가와 언어들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몸을 포착한다. 인간성의 범위에서 해석되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의 일들과, 비인간성의 영역에서 말할 수는 없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들. <내가 물에서 본 것>은 이러한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영역을 오가며 진정한 인간의 몸을 탐구하고자 했다.
난임 시술과 여성의 몸,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 결국 여성이라는 정체성. 구태여 언급하지는 않겠으나, 이와 관련한 일반적인 반응을 떠올려 본다. 어떤 사실, 그리고 그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은 실제 그를 겪어낸, 또는 겪어내는 과정의 당사자에게 있어선 무릇 어색하고 왜인지 해명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시술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그 단일하고도 피상적인 도달점에 대한 여부가 아니라, 그 이면의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돌연 발설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공연을 통해 불쾌함을 느꼈다면, 이들은 그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다. 그 불쾌와 낯섦의 과정을 통해 다다르게 된 몸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그들의 몸짓이 ‘고발’이 아닌 ‘발설’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차수민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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