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럼에도 네게서 눈을 떼지 않을 거야 - 매거진 조이 Vol.1: 집이 없어
-
삶에 선명한 흔적을 남겼던, 그러나 지금은 기억의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지난했던 어려움에 명쾌한 해답이 되고는 ‘좋았다’ 정도의 인상으로만 남아버린 이야기들. (그 가치와는 별개로) 좋은 이야기는 숱하게 쌓이는 어려움을 거치며 풍화되고, 우리는 새로운 고통에 맞설 또 다른 이야기를 좇아야 한다. *여전히 사람들이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유일 테다.
새로운 이야기를 탐색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어떤 좋음은 부지런히 복기 될 필요가 있다. <매거진 조이 Vol.1: 집이 없어>를 보면서 잊고 있던 소중한 감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나의 작품, 한 명의 작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웹툰 전문 매거진 ‘매거진 조이’는 창간호 작품으로 와난 작가의 <집이 없어>를 선정했다.
<집이 없어>는 2018년 연재를 시작한 이래로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며 여러 번의 수상 경력도 있는 명실상부한 웹툰이다. 각자의 이유로 ‘집’을 떠난 청소년들이 사랑과 우정과 갈등과 폭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집’을 지어나가는 이야기. 언뜻 보면 흔한 청소년 성장 서사로 여겨지기 쉬운 <집이 없어>엔 특유의 문법이 있다.
칼럼니스트 위근우는 그 문법을 아래와 같이 명료하게 설명했다. “<집이 없어>는 세상의 폭력성 앞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 서로 오답을 주고받으며 함께 헤매는 것만이 유일한 성장의 기회라는 것을 역설한다.” 그의 말처럼 <집이 없어>는 정답보단 오답으로, 대답보단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고해준, 백은영, 박주완, 김마리, 공민주, 강하라. 여섯 청소년의 고유한 서사와 관계를 다룬 이야기는, 거칠게 요약하면 ‘어떻게 타자를 응시하고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때 꾸준히 심문 대상이 되는 것은 누군가를 재빠르게 판단하여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집어넣는 관성이다.
빠른 권선징악을 목표로 하는, 마치 하나의 오락 같아 보이는 판단은 현상의 본질보단 표면에 집중한다. 행동과 감정의 근원을 추적하지 않은 채 그 주체만을 단죄하고 모종의 우월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에 특히 취약한 존재는 청소년(을 비롯한 소수자)이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이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교육 제도가 ‘보호’하는 학교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 그들에게 할당된 전부다. 청소년들은 개인의 특성과 환경에 관계없이 이러한 틀에 맞춰지기를 요구받는다. 반대로 말하면, 그 틀에서 벗어난 청소년들은 가차 없이 ‘보호’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집이 없어>는 자의 혹은 타의로 제도권의 ‘보호’ 밖에 존재하게 된 청소년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때론 스스로를 ‘악하다고’ 여기면서 주체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고 생각한다. 웹툰은 그런 ‘주체성’의 이면엔 아이들이 스스로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여러 구조가 존재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데 집중한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김마리와 백은영은 그 명징한 사례 중 하나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이란 사실 생존과 다른 의미가 아니며, 그건 곧 제도권의 '보호'가 매우 편협하고 그 아래 놓일 수 있는 아이들은 극히 적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악함의 배경을 드러내는 의도가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식의 쉽고 안일한 화해를 시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아이들은 못된 일을 저지르고, 눈앞의 사건을 두고 서로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비난하고 단죄한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죽일 만큼 증오하기도 한다. 다만, 누군가의 이면을 알아갈수록 그 역시 자신과 다름없이 상처로 얼룩진 인간이라는 사실도 함께 깨달아 버린다. 아이들은 현상과 배경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무의미한 비난을 방조하는 행위임을 물에 스미듯 자연스럽게 배운다.
자신의 힘만으로 벗어날 수 없는 폭력과 상처의 굴레에 빠진 아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건 완전무결하고 강력한 영웅이 아니다. 똑같이 폭력과 상처의 굴레에 빠진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상처가 있었기에 비슷한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고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 바라보지 않을 수 있음에도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그 이유로 아이들은 서로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서로를 향한 애증을 초월하여 계속되는 응시는, 아이들을 미세하게 변화시킨다. 눈 앞의 너를 완전히 사랑할 수도 없지만, 완전히 증오할 수도 없게 만든 것이다. 대신에 아이들은 각자의 오점을 표백하거나 없는 것 취급하지 않고, 얼룩덜룩한 상태로 껴안는(혹은 거리를 두는) 법을 배운다.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흔적을 품은 채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한다. 악인도 선인도 되지 않은 채 방황하는 한 존재로서 서로를 응시한다.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으려 긴장하고, 그 모든 불안을 실패한 누군가에게 비난과 멸시의 형태로 배설하는 한국 사회의 문법과는 무척 다른 양상이다.
앞서 말했듯 캐릭터들은 각자의 성질과 배경과 ‘흔적’을 갖고 있다. 누구든 그것과 무관한 독자는 없을 것이고, 이입하거나 몰입하게 되는 서사 역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집이 없어>를 단일한 시선으로만 조명하는 것이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거진 조이’는 웹툰의 특성을 고려하여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일곱 작가의 리뷰를 첨부했다. 누군가는 성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행복과 불행에 얽혀있는 양상에 대해, 어른의 책임감에 대해, 퀴어니스로 바라본 우정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아이들의 강력한 연대에 대해 논했다. 여러 시선들은 한 개인으로서는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집이 없어>의 매력들을 상세히 조명했다.
재밌는 점은 저마다의 관점이 공통적으로 수렴하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강조했던 '서로를 향한 집요한 응시’다. 작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건 미시적인 순간이 아닌 거시적인 방향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의 사건으로 개과천선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삶은 그렇게 깔끔하고 단순한 질서에 놓여있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제자리이고, 제자리인 것 같다가도 나빠지는 모습의 반복인 이유는 그래서다. 사람은 결코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다만 작가는 그들을 향한 시선을 결코 놓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평가를 갱신한다. 그것이 누군가를 평가하려는 사람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 누군가가 나를 향한 시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만 사람은 겨우 조금씩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선형적인 발전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갖고 있다. 조금만 후퇴하거나 머무르는 느낌이 들면 맥없이 좌절한다.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스스로도 흘러야 한다는 강박적인 긴장 상태. <집이 없어>는 그런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다.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고, 그럼으로써 타인도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집이다. 이곳에서는 나의 어떤 파편도 사라지거나 과시되어야 하는 게 아닌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
매거진 조이를 통해 다시 한번 <집이 없어>를 돌이키면서 굳건히 갖게 된 믿음이 있다. 나의 취약함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상대의 취약함을 발견하는 것만이 애틋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 그건 자기비난이나 상대를 물어뜯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을 회복하기 위함이라는 믿음.
그 속에서만 추적한 불행은 마냥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있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의 고통을 말미암아 한 발자국씩 움직일 수 있다. 삐뚤빼뚤할지라도, 결국 서로를 치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집은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런 마법 같은 이야기가 이미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의 시간 속에 이미 축적되어 있음을 재차 기억한다.
* 이랑의 <신의 놀이> 가사에서 차용
[정해영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