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알 것인가, 모를 것인가?
미래를 본다는 것의 양면적인 유혹성에 관한 질문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나 또한 SNS에서 ‘자신이 죽는 날을 알 수 있거나, 혹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알 수 있다면 알 것인지’를 묻는 게시물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내 미래를 알게 된다면, 나는 결코 그 미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고. 미래에 일어날 일이 두려워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리라고.
그렇다면, 아주 짧은 시간 후의 미래를 엿보는 능력은 어떨까. 짝사랑하는 사람과의 데이트 신청에 성공했는지, 방금 구매한 복권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찾고자 하는 물건을 찾았는지와 같은 작고 소소한 미래를 알게 되는 능력은 장점만이 존재하지 않을까.
여기, 2분 후의 미래를 엿볼 수 있게 된 평범한 사람들이 있다.
영화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에 등장하는 카페 사장 카토와 그 친구들이다.
여느 때처럼 카페를 마감하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쉬던 카토. 그런 그에게 모니터 속에서 ‘2분 후 미래의 카토’가 말을 걸기 시작한다. 미래의 카토는 현재의 카토에게 이곳 방에 있는 모니터와, 카페의 모니터가 2분의 시차를 두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린다. 현재의 카토는 카페로 내려가 2분 뒤의 자신에게 같은 사실을 전달한다. 그렇게 카토는 미래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를 오가며 미래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마냥 이 현상을 신기하게만 생각하던 카토와 친구들은, 곧이어 모니터 두 대를 서로 마주보게 놔두면 더 먼 미래의 일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그의 친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소소하게 복권의 당첨 결과를, 나중에는 큰 돈을 아무런 노력 없이 얻는 방법을 미래에서 현재로 전달하려 한다. 카토는 슬슬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다. 미래의 자신이 전한 말을 완벽하게 신뢰할 수 없을뿐더러, 미래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미래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물론 미래를 보는 것이 꼭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카토는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을 이용하여 좋아하는 사람을 조폭들로부터 구해내는 데에 성공한다. 아무런 힘도, 복잡한 계획도 쓰지 않고, 미래의 자신이 전한 몇 가지 단어로만 말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알게 되는 것은 해롭다’는 단편적인 문장이 아니다.
영화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이후 카토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카토는 2분 후의 미래를 보여주는 모니터 속에서, 순순히 약을 먹고 잠드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한다. 지금까지 모니터 속과 다른 미래는 나타난 적 없으므로, 미래에 오류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카토 역시 약을 먹고 잠든다는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이 이들이 생각했던, 올바른 방법이다. 그러나 카토는 생각한다. ‘2분 후의 미래’에 끌려다니는 자신이, 정말 ‘나 자신’인가? 현재의 카토는 영원히 미래의 카토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것인가? 카토는 미래가 아닌 현재를 선택하고, 현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게 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미래를 알게 된다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알지 못하지만, 궁금증이라는 인간의 본능을 해소하기 위해 상자를 여는 선택을 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점이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한 번 열면, 다시는 그 안에서 빠져나간 것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카토와 친구들은 미래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 미래가 그대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한 번 알아버린 미래를 다시 잊어버릴 순 없다. 우리가 어떤 미래를 보았든, 우리는 그 미래가 실현될 날만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살아가게 된다. 현재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에게 휘둘리는 것이다.
결국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현재의 우리가, 저편의 우리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는 항상 저편의 우리들의 모습을 궁금해하고 닿고 싶어 한다. 엇나가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그들과 우리를 동일시하려 한다. 그러나, 저편의 우리들과 지금의 우리들은 동일한 ‘우리’가 아니다. 어쩌면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또 다른 현재의 선택을 한 수많은 가능성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니까. 저편의 모습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미래를 만드는 것은 현재의 나 자신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