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3696171601_VdlOZcSq_852979.jpg


 

내내 홀로 서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잠시 발을 맞춰 걸었던 적은 있어도, 허공에서 맞닿는 시선을 한 움큼씩 나눠가졌던 적은 있어도,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서있어야만 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홀로였다. 사람은 꼭 앞으로 걸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 이따금 보이지 않는 뒤편을 상상하며 뒤꿈치를 들 때면 이상할 만치 시린 목련의 발가락들 (木蓮, 김경주).

 

군대를 가기 전에 멀어졌던 대학교 친구와 몇 달 전 학교에서 재회하여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던 날 이후로 그와 종종 대화를 나눈다. 전보다 얕은 이야기지만 오히려 불편한 구석이 없다. 어느 날은 이런 대화도 주고받았다. "아무 이유 없이 가까워지는 일이 얼마나 불편한지." 그렇다. 이유 없이 누군가와의 거리를 좁히는 일은 퍽 불편하다. 다시는 가까워질 일이 없는 그와의 대화가 편하게 느껴지는 만큼.

 

그러나 편함은 내게 우선 순위가 아니다. 그는, 편하게 느껴져서 싫다. 누군가와 함께 불편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다. 그런 것은 힘들다기보다는 아깝다는 느낌에 가깝다. 시간을 거리에 내다 버리고 오는 것만 같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고통스러워지고 싶다. 내내 홀로 아팠다. 그 사람이 오기 전까지 나름 괜찮은 자세를 갖추어 홀로 서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한 사람들은 몇이나 되는가.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새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 서정윤, <홀로 서기> 부분

 

 

그러나 과연 나에게는 충분한 밤이 남아있을까.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어려운 것은 잠을 자도 해결되지 않는다. 생각처럼 태연하게 삼킬 수 있는 꿈들이 아니었다. 너무 길어진 밤을 다 토해내느라 시간에, 혹은 당신이 누워있던 시간에 나는 홀로 서있었다. 당신은 나보다 오래된 꿈을 그토록이나 길게 살아낼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서는 꿈조차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홀로 선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균형 감각을 요구한다. 저마다 등을 맞대어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강제로 할당된 균형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균형을 홀로 선 내가 대신해서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나의 두 발을 바라본다. 오직 두 다리에 의지하여 서있는 것일까.


 

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 

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되어가고

나는 나를

좋아하고 싶어지지만

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

 

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 신해욱, <축, 생일> 전문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은 삶이기에, 불면의 밤을 버티며 홀로 서기를 익히려 해도 끝내 온전한 '홀로 서기'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홀로 서있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이 되어간다. 정말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당신이 없는 시간에도 홀로 잘 서있겠다며 스스로와 맺는 기약 없는 약속. 무엇을 위해서 하는지 모르는 약속은 불안하다. 언제가 끝이라고 누구도 내게 말해준 적 없는 약속을 지키며 하루를 보낸다. 당신은 이 약속을 잊었을 법도 하다.

 

올 한 해도 끝나간다. 올해를 당신과 함께 시작했다고 생각해왔는데, 돌이켜보니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별은 문득 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나는 당신과의 기약 없는 시작을 앞두고 있다.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한 해를 보내고 또 맞이한다. 혹은 시작했다고 믿었던 것들과 함께.

 

우리는 작별보다 멀리 와 있는 것이다.


 

발 아픈 나의 애견이 피 묻은 붕대를 물어뜯으며 운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확인하고 있는 내게 저벅저벅 다가와

간신히 쓰러지고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의 입을 빌려 말할 것만 같다.

'세상의 어떤 발소리도 너를 닮지 못할 것이다'

네가 너는 아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꺼냈을 때

나는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되물었다

사랑이 힘이 되지 않던 시절

길고 어두운 복도

우리를 찢고 나온 슬픈 광대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떨어져 살점을 흩어지는 동안

그러나 너는 이상하게

내가 손을 넣고 살며시 기댄 사람이었다

 

- 주하림, <작별> 부분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럴 수는 없을 텐데. 나 하나만, 너 하나만이 그토록 이상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잠을 자는 시간에 가장 홀로될 수 있는가. 그러나 내게는 오직 그 시간만이 둘 이상을 허락한다. 잠을 자는 동안에는 가장 쉬워질 수는 있을 것이다. 너의 발소리도 꿈에서는 여전히 나와 닮아있을 것이다. 너와 닮은 발소리를 가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가진 일은 후회스럽지 않다. 그러나 살며시 기대었던 나의 모습은, 어쩌면 나도 모를 어느 장소에 하나의 이미지로 전경화되었을지 모르겠다. 혹은 너의 눈동자가 그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지.

 

우리가 한번이라도 어렵지 않은 적이 있냐고 당신에게 물었더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그때 우리는 홀로 서있던 것도 함께 걸어간 것도 아니었다고,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한 것이냐고.

 

그래서 그 둘을 동시에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나는 균형을 잃는다. 너도 그럴 것이라 믿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모든 사물이 습기를 잃고

모든 길들의 경계선이 문드러진다.

레코드에 담긴 옛 가수의 목소리가 시들고

여보세요 죽선이 아니니 죽선이지 죽선아

전화선이 허공에서 수신인을 잃고

한번 떠나간 애인들은 꿈에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고 괴어 있는 기억의 폐수(廢水)가

한없이 말 오줌 냄새를 풍기는 세월의 봉놋방에서

나는 부시시 죽었다 깨어난 목소리로 묻는다.

어디만큼 왔나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최승자, <개 같은 가을이> 전문

 

 

나는 내내 홀로 서있었다. 어디까지 가야 강물은 바다가 될 수 있을까.

 

 

 

유민.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