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적이 무대에 올린 《인간동물들》(스테프 스미스 작, 마정화 번역, 이곤 연출)은 시작부터 관객의 예상을 비껴간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 앉아 극을 시작하는 순간, 관객은 자연스럽게 '움직임'이 아닌 '표정'과 '말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몸짓으로 감정을 증폭시키는 대신 최소한의 동작만을 허락한 이 선택은, 오히려 배우들의 얼굴과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균열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절제된 무대 위에서, 극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그어진 오래된 경계선을 조금씩 지워나간다.
낯설게 스며드는 언어
극 중 인물들의 이름과 대사가 번역된 언어를 통해 들려오는 방식은 생소하면서도 몰입도를 높인다. 제이미, 리사를 비롯한 인물들의 대화는 매끄럽게 다듬어진 말이 아니라, 어딘가 결이 살아있는 언어로 전달된다.
특히 모든 배우가 동일한 문장 혹은 단어를 반복하는 장면 — 작가가 '블링크(blink)'라 명명한 시적 삽입 장면 — 은 이 작품이 인간의 언어와 동물의 언어 그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경계 위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코러스처럼 겹쳐지는 대사와 음악적 리듬은 인물들이 처한 혼란과 고립, 단절의 감각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옮겨온다.
가장 비인간적인 사고, 제이미
"원래 여우의 조상이 살았을지도 몰라... 어쩌면 우리보다 더 먼저 말이야. 이건 우리의 정원이 아니야. 여우의 것이기도 해." 제이미가 리사에게 건네는 말은 극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을 압축하고 있다.
제이미는 극에서 가장 비인간에 가까운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그가 취하는 태도는 인간 중심적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만물평등적 사고에 가깝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서까지 드러나는 그의 사고방식은 사뭇 징그럽고 기괴하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는 종이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는 작가의 문제의식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실주의자 리사, 가해자이자 피해자
제이미의 연인 리사는 그와 대비되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 그는 도시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 일조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 혼란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이중적인 위치는 작품이 인간을 단순히 가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연을 망가뜨린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붕괴 속에서 함께 스러져가는 존재다. 리사와 제이미 사이의 온도차는 결국 재난 앞에서 각자가 붙잡고 있던 신념이 얼마나 다르게 흔들리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지구, 그 주인 의식에 대해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2016년에 쓰였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팬데믹 이후에 나온 이야기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난 몇 년간 이미 겪어본 감각 —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사회가 삐걱대며 무너지는 그 특유의 속도감 — 을 무대가 정확히 되짚고 있었다. 쥐와 비둘기, 여우가 도시를 잠식해가는 설정은 그래서 공포보다는 기시감을 자아낸다. 그 기시감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되묻게 된다. 인간이 종의 위계 꼭대기에 있다는 믿음은 애초에 얼마나 근거 있는 것이었나.
극이 결국 하려는 말은 인간도 언젠가 사라질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어찌 보면 단순한 사실이다. 다만 이 무대가 끝내 절망 쪽으로 완전히 기울지 않고 관객을 붙잡아두는 지점은, 끝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그 끝을 어떤 태도로 맞이할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걸 계속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객석을 나서면서 남은 것은 화려한 장치나 과장된 동작을 걷어낸 무대의 여백이었다. 배우의 언어와 표정, 조명과 사운드만으로 채워진 무대는 관객 각자가 자신의 상상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게 만든다.
그 비움 속에서 《인간동물들》이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되묻는 것은 결국 하나다 — 인간과 동물, 문명과 자연, 가해와 피해 사이에 그어진 경계란 우리가 편의상 그어놓은 선일 뿐, 실은 그만큼이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