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 기술의 저변: 경계에 선 장면들 》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가나아트컬렉션 기획전 《 기술의 저변: 경계에 선 장면들 》은 1970-90년대 한국 리얼리즘 회화를 통해 산업화와 도시화의 시기, 한국 사회의 풍경을 되짚는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순차적으로 설계된 공간을 지난다. 〈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를 지나야 〈 새로운 질서의 심연 〉에 닿고, 그다음에야 〈 찬란한 공허 〉에 도착한다. 세 개의 섹션은 세 개의 주제가 아니라, 하나의 감정선이다. 다만 이 감정선을 사회적 고발로만 읽으면 이 전시의 절반만 보게 된다.
전시 서문이 말하듯 "기술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사람들의 일상과 경험을 변화시키는 조건으로 작동했다." 이 전시가 진짜로 추적하는 건 가난이나 억압 그 자체가 아니라, 매 시기 다른 얼굴로 나타난 "기술"이 인간과 맺어온 관계다. 이 글은 그 순서를 따라가며, 각 섹션마다 어떤 기술이 배경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 기술 앞에서 예술은 무엇을 했는지를 함께 보려 한다.
1막. 견디는 사람들 — 토목의 기술

첫 번째 섹션의 그림 속 대상들은 황폐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안보선의 〈 걱정의 시간 〉 속 노동자는 담배를 쥔 채 먼 곳을 본다. 신학철의 〈 시골길 〉에서 곡괭이를 든 농민은 지나가는 승용차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이종구의 그림 속 밭에는 거대한 굴착기가 다가오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손은 어디에도 없다. 이 방을 채우는 동사는 '견디다'와 '바라보다'다.
이 방에는 농촌만 있는 게 아니다.
김인순의 〈 내 이름은 미경이 〉는 같은 시기 공장에서 일하다 스러진 여성 노동자 권미경을 그린다. 시계를 든 인물, 쓰러진 몸, 그 옆에 나란히 놓인 웃는 여성의 이미지. 견디다 못해 죽음으로 저항해야 했던 이의 마지막 말이 그림 제목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방의 정서가 단지 관조가 아니라 실제 죽음과 맞닿아 있었음을 일러준다.
이 방의 기술은 아직 손에 잡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굴착기, 양곡부대라는 재료 자체가 상기시키는 저곡가 정책과 유통 시스템 — 모두 땅과 몸에 직접 작용하는 토목·농업 기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무력감이 재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종구는 캔버스가 아니라 실제 양곡부대에 그림을 그렸다. 밥상을 그린 작품은 나무 반상 위에, 그것도 진흙으로 빚은 그릇 파편을 얹어 완성했다. 이건 단순한 기법적 선택이 아니다. "나는 이 현실을 상상해서 그리는 게 아니라 이 현실 위에서 그린다"는 선언에 가깝다. 산업 기술이 만들어낸 포장재를 다시 손으로 그린 화폭으로 되돌리는 이 행위에는, 기술을 전면 부정하기보다 그것을 거슬러 다시 만지려는 태도가 있다. 리얼리즘이 소재를 넘어 재료의 사실성으로 밀고 들어간다.
2막. 응시가 폭로로 바뀌는 순간 — 매체의 기술

두 번째 방에 들어서면 톤이 완전히 바뀐다. 더 이상 견디는 태도는 없다. 대신 구조를 읽어내는 시선이 있다. 박불똥의 〈 새도시-행복예감 〉은 신도시 지적도를 새의 형상으로 바꿔 투기 자본의 탐욕을 그려내고, 〈 돈쟁 〉은 전쟁과 정치와 화폐를 한 화면에 욱여넣어 그 셋이 사실은 같은 경제 구조 안에서 작동한다는 걸 폭로한다.
이 방에서 기술의 얼굴은 손에 잡히지 않는 쪽으로 옮겨간다. 컬러텔레비전의 보급, 대중매체의 이미지 생산 시스템, 부동산 개발 정보를 선점하는 유통망 — 이제 기술은 땅을 파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만들고 퍼뜨린다. 예술의 방법도 함께 바뀐다. 1막이 재료의 사실성을 붙잡았다면, 2막은 콜라주와 포토몽타주다. 박불똥의 작품은 잡지와 신문에서 오려낸 이미지를 다시 오프셋 인쇄 기술로 복제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예술가는 대중매체의 기술 자체를 등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기술을 가져와 되받아친다. 텔레비전과 인쇄술이 이미지를 만든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 텔레비전과 인쇄술을 겨냥한 이미지를 만든다. 기술은 이 방에서 기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폭로의 도구다. 1막의 화가들이 목격자였다면, 2막의 화가들은 같은 무기를 쥔 해부자다.
김정헌의 〈 모녀 〉와 〈 서울의 찬가 II 〉도 같은 맥락이다. 텔레비전 속에서 활짝 웃는 모녀, 대기업 로고가 겹쳐진 빌딩 숲. 여기서 폭로되는 건 가난이나 억압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매체 기술을 통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방식이다.
3막. 폭로 이후, 남는 것 — 보이지 않는 기술

세 번째 방에는 흥미롭게도, 1980-90년대를 벗어난 작품들이 섞여 있다. 이원철의 2008년 사진, 김세진의 2009년 영상, 박은태의2021년 회화. 왜 하필 '공허'를 다루는 방에서만 시간이 흘러넘칠까.
여기서 기술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물체도, 매체의 이미지도 아니다. 박은태의 〈 황금 모듈 〉은 컴퓨터 회로기판 위에 몸을 구부린 채 일하는 노동자들을 그려 넣는다. 이를 신학철의 〈 부자(父子) 〉 속, 버려진 플라스틱으로 조립된 아버지와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질문이 보인다.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가 속한 시스템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는 부속으로 남아 있다는 것. 다만 이 반복을 오직 비관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이원철의 장노출 사진은 차갑게만 보이는 산업 구조물 속에서 인공광과 자연광, 삶과 죽음 같은 상반된 시간이 공존하는 유기적 리듬을 찾아낸다. 기술이 만든 풍경이 반드시 생명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다른 가능성이 여기 있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흥미롭게도, 나무가 보인다. 이상국의 〈 나무-옐로우 〉. 황토색 바탕에 노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벽면 텍스트는 이것을 "상처와 결핍 속에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기운과 미래의 가능성"이라 설명한다.
나무 한 그루, 충분한 걸까.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1막의 무력감과 2막의 폭로를 지나온 다음, 3막이 결국 나무 한 그루의 회복력으로 마무리되는 이 구성은 정직한 결론일까, 아니면 관조적 제스처일까.
이 질문에 답을 정해두고 싶지는 않다. 민중미술과 신형상주의 작가들이 겨냥했던 것은 분명 위로만은 아니었다. 신학철의 붉은 손은 분노였고, 김인순의 〈 내 이름은 미경이 〉는 애도가 아니라 고발이었다. 그러나 이 전시가 보여주는 40년의 기술사에는 또 다른 결이 있다. 기술은 이 전시에서 늘 두 번 나타난다. 처음엔 무언가를 빼앗는 손으로, 다음엔 예술가가 쥐는 새로운 도구로. 굴착기 앞에서는 양곡부대가, 텔레비전 앞에서는 포토몽타주가, 회로기판 앞에서는 장노출 사진과 영상이 나왔다.
이상국의 나무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다. 기술이 무엇을 빼앗아가도, 사람은 다시 붓을 들었다. 그러니 이 나무를 결말로 보지 않아도 된다. 질문으로 봐도 된다. 다음 기술이 오면, 또 누군가는 손을 들 것이다.
이 전시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아마, 지금 우리 앞의 기술 앞에서 예술은 무엇을 그릴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그릴 것인가.
《 기술의 저변: 경계에 선 장면들 》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에서 2026년 11월 22일까지 진행된다.